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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하노이 북·미 회담의 큰 결실이 쉽지 않은 이유

중앙일보 2019.02.28 00:35 종합 31면 지면보기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독자 여러분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 중인 날에 이 칼럼을 읽겠지만, 필자는 정상회담의 직전에 이 글을 쓰고 있다. 회담이 끝난 뒤에 그 결과와 이 칼럼을 비교하며 필자의 예측이 얼마나 맞았는지 살펴봐 주시길 바란다. 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에 실질적 진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두 가지 근거 때문이다. 첫째, 이번 회담을 위한 사전 준비 과정은 싱가포르 회담 때의 과정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그리고 싱가포르 회담에서 구체적인 진전이 거의 없었다. 하노이 회담에서 두 정상이 공동선언을 한다는 보도가 있기는 하지만, 비핵화 협상의 세부사항을 조율하는 사전 논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실무회담 때도 회담 장소, 회담 횟수 등을 논의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쓴 듯하다. 둘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비핵화 ‘속도 조절’을 언급했다. 그는 2월 19일에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 북한이 궁극적으로 비핵화가 되는 것을 보고 싶을 뿐이다”고 말했다.
 

사전 조율 작업이 활발하지 않았고
이미 미국 측에서 ‘속도 조절’ 언급
영변 폐쇄와 제재 완화 예상되지만
북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만이 관건

실질적 진전은 없을지라도 하노이에서 북핵과 관련한 선언이 나올 가능성은 있다. 2월 22일에 백악관은 “북한이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시설 해체를 약속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쇄에는 동의할 것 같다. 긍정적인 신호지만,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이고 핵심적인 진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영변 핵시설은 이미 낡아 가동 자체가 어렵다.
 
비핵화에 실질적인 진전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과연 하노이 정상회담은 어떤 결과를 낼까. 지난번 칼럼에서 필자는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약속한 경제적 번영이라는 비전을 큰 부담으로 안고 있다고 썼다. 김 위원장은 경제제재 완화를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바라고 있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재 완화에 동의할 가능성도 있다.
 
존 에버라드칼럼

존 에버라드칼럼

제재 완화에는 여러 수준이 있다. 북한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부분은 남북 경협을 가로막는 국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대가 없이 개성공업지구와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용의가 있다”며 남북 협력 프로젝트를 언급했다. 도로 및 철도 재건 등 한국의 도움이 필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북한으로서는 반드시 제재가 완화돼야 한다. 북한은 장기적으로 제재 해제를 줄기차게 요구하겠지만, 지금은 제재 완화 정도로도 만족할 것이다.
 
지난해 북한은 공공연하게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고, 하다못해 한국전쟁 종전선언이라도 얻어내려고 애를 썼다. 2018년 상반기에 북한은 종전선언이 없는 협상 조건을 달가워하지 않은 눈치였다. 그러자 지난 여름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북한의 핵무기 목록 신고 및 검증을 조건으로 종전을 선언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는 북한이 바라는 카드가 아니었고, 북·미 관계는 경색됐다. 그 뒤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는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이제 입장이 바뀌었다. 한국전쟁 종전을 선언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트럼프 대통령을 사로잡은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보다도 자신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할 ‘평화’에 관심이 더 크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분석대로라면 북한은 종전선언을 대가로 한 보유 핵무기 목록 공개에 대해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조건이 어떻든 트럼프 대통령이 문서에 기꺼이 서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평양에 북·미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겠다고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때도 추진됐으나 실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회담에서 연락사무소 개설 발표가 있더라도 섣불리 축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는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지만, 필자는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 북핵과 관련된 명목상의 선언(이미 쓸모없어진 핵시설 폐기 등)은 있겠지만,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실질적인 진전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공식적인 평화협정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한국전쟁 종전선언 같은 발표가 있을 수도 있고, 북·미 연락사무소 설치 합의도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제재가 일부 완화돼 남북 협력 프로젝트 추진이 가능해질 수도 있다.
 
문득 궁금해진다. 100년 전 일제에 대항해 용감하게 독립운동을 벌인 조선인들이라면 이 회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당시 조선인들은 하나의 자유로운 번영 국가를 꿈꿨다. 그런 노력과 희생으로 지켜낸 조국이 100년 후에는 두 나라로 분열돼 있고, 그중 한 나라 국민은 탄압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고, 이 두 나라의 운명은 머나먼 나라인 미국의 변덕스러운 대통령과 북한 독재자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통곡하지 않을까.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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