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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착한 정권 넘어 똑똑한 정권으로

중앙일보 2019.02.27 00:43 종합 27면 지면보기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착한 녀석과 똑똑한 녀석-.
 

선의 넘쳐도 실력 부족하면 되는 일 없어
독선 ‘박근혜 2기 정권’ 목소리 경계해야

부모는 자녀가 어떤 소리를 듣기 원할까. 설문조사를 해 봐야겠지만 어린 시절 경험으론 단연 후자가 압도적이었다. 키가 작아 대개 교실 맨 앞줄에 앉다 보니 칠판 바로 옆의 담임선생님 책상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뤄지는 학부모와의 학사면담 내용을 자주 듣게 됐다. 공부가 보통인 평범한 급우의 어머니에겐 “아주 착하고 성실해요” 말고 덕담이 궁했을지 싶다. 공부 잘하는 몇몇 아이 어머니를 만나면 달랐다. “똑똑하고 시험점수도 높아요” 칭찬에 어머니들 얼굴에 꽃이 활짝 피었다.
 
‘착한 어린이’는 웬만한 초등학교 교훈의 단골 문구인 으뜸 품성인데 어머니들은 왜 심드렁할까. “똑똑하다”는 이야길 꼭 들어야 성이 찰까. 당시 어린 꼬마에겐 의아했지만, 학업 경쟁이 시작되는 중학교에 진학하니 궁금증이 확 풀렸다. 학벌사회의 비정한 사교육 경쟁을 그린 ‘스카이캐슬’이 대단한 히트를 친 걸 봐도 착함보다 똑똑함을 쳐주는 세태는 예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어린 시절 기억을 문득 떠올린 건 ‘착한 정부’ 프레임에 빠진 정권에 대해 ‘똑똑한 정부’의 국민 여망이 커가는 조짐 때문이다. 착한 이상을 구현할 똑똑한 정부를 국민이 열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여론조사 등에서 나타난다. 일단 저지르고 허겁지겁 땜질하는 정책이 왜 이리 많은가. 그런데도 “우리의 길은 옳다” “DNA 자체가 다르다” 식의 경직된 독선이 걱정스럽다. 선의가 무능의 면죄부일 수 없다.
 
정권 출범 이후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지옥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는 경구들이 부쩍 유행했다. 선의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능력 부족 탓이었다. 툭하면 나라 곳간 열어 공무원이나 임시직 양산할 생각만 했지 공유경제·혁신성장 제대로 해 일자리 늘리지 못했다. 한국전력을 적자기업으로 만든 탈원전과 에너지전환의 과속을 조절해야 한다. 조선 시대 사화와 같은 적폐청산으로 나라를 결딴내지 말고 정밀 외과수술 같은 개혁을 단숨에 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과 소득주도 성장은 “조정경기 키잡이·노잡이의 협동처럼 복지·거시·노사·자영업·공정거래 등 여러 정책이 호흡을 맞춰 해야 했다.”(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장)
 
“나쁜 시장이 착한 정부보다 낫다”는 자유주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충고가 새삼스럽다. 부실정책이 시장 상황을 악화시키기 일쑤라는 이야기다. 어린이는 착해빠진 것이 미덕일 수 있지만, 선의에 들뜬 정부는 베네수엘라처럼 포퓰리즘 함정에 빠지곤 한다. 이것저것 손대는 만기친람 정부보다 국부(國富)와 일자리의 샘물인 기업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게 옆에서 도와주는 ‘넛지형’ 스마트 정부가 간절하다. 방향이 엉뚱하거나 미숙한 정책은 그 자체로 시장의 엄청난 리스크다. 프리드먼의 이런 경고를 담은 명저 『화려한 약속과 음울한 성과』가 큰 정부를 당연시하는 이 정권의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노릇을 해줬으면 좋겠다.
 
집권 3년 차인 요즘엔 그나마 ‘착한 정부’ 이미지까지 거추장스러운 것 같다. 정책 실효성 논란이 일 때마다 “좀 더 두고 보자” “잘못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으냐”는 설득 조 해명에 나서다가 올해 들어서는 국민을 상대로 우기고 성내는 듯한 일이 잦아졌다.
 
MB의 토건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20조 원짜리 초대형 인프라 사업의 예비타당성 검토를 면제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서”라는 한마디로 눙쳐버린다. 김경수 경남지사의 법정구속에 대해 여당이 총력적으로 3권분립을 훼손하는 ‘사법 농단’을 자행한다.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체크리스트일 뿐이라고, 20대 청년 계층의 뿌리 깊은 불만은 보수 정권 시절의 잘못된 반공 교육 탓이라고 우긴다. 불통의 조짐에 "박근혜 정권 2기 같다”는 비평이 고개를 든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착하다고 한 아이가 다 착하지는 않았다. 친구들 무시하고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던 막무가내도 꽤 있었다.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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