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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필의 인공지능 개척시대] 인공지능 판사와 사법개혁

중앙일보 2019.02.27 00:43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필자에게 사시(司試) 공부가 어렵지 않았냐고 묻는 이들이 가끔 있다. 특히 그렇게 많은 법은 어떻게 다 외웠는지 신기하다고들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시 준비에 법조문을 암기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법조문을 외우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시험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라고 할 정도다.
 
법 내용을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은 판례(判例)를 공부하는 것이다. 법마다 중요 판례로 손꼽히는 것이 수백 건이 넘으니, 그것들을 읽고 이해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판례들에 있어서는 쌍방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원고 주장이 맞지만, 반대편에 서서 보면 피고 주장이 맞아 보이기도 한다. 무릇 세상일에는 칼로 무를 베듯이 명확하게 선을 긋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판례들은 그렇게 애매한 사건들의 경계를 정한다. 그래서 법을 배운다는 것은 이제까지 축적된 판례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공지능 2/27

인공지능 2/27

‘인공지능 판사’ 이야기를 해 보자. 2016년 ‘알파고’ 대국 이후 언론에는 인공지능 판사가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최근 들어서는 사법농단에 관한 인터넷 기사에 인공지능 판사를 도입하자는 댓글도 많다. 인공지능 판사는 감정, 편견, 정치적 성향 혹은 외압 등에 좌우되지 않고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기대가 조만간 현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인공지능 판사에게 법을 가르쳐 주면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마치 법조문을 잘 암기하면 사시에 합격할 수 있는 생각과 무척이나 닮았다. 법 조문만 외워서는 사시에 합격할 수 없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법조문만 학습해서는 쓸모가 있기 어렵다.
 
사법 시스템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려면 많은 판결문을 학습시켜야 한다. 알파고가 16만 건의 기보를 학습해서 바둑 실력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판결문을 학습해야 판결을 내리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판결문 공개가 너무 제한되어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심, 2심 법원 판결은 전체 사건의 0.003%만이 일반에 공개되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학습 데이터를 구하기가 어려우니, 관련된 인공지능 기술을 개발하는 이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비해 해외에서는 로펌이나 스타트업들이 법률 분야에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하려는 열기가 뜨겁다. 판결문 예측, 법률 실사, 계약서 검토 등 분야에서 급속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혁신적인 기술을 이용해서 사법 서비스의 품질을 높이고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이런 기술을 ‘리걸 테크(legal tech)’라고 칭한다. 우리나라는 리걸 테크 분야에서 한참 뒤처지고 있다.
 
헌법 제109조는 “판결은 공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왜 법원은 판결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일까? 주된 이유는 개인정보 보호이다. 물론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러 기술이 발전하면서 개인정보를 보호하면서도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이제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판결문의 공개를 늦추는 것은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기회를 잃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우리 법원이 더 많은 판결문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국민이 조금씩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판결문 공개를 통해 우리나라 리걸 테크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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