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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하노이에서 본 ‘사랑과 비핵화’

중앙일보 2019.02.27 00:36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하노이에 도착해 가장 인상적인 건 끝없는 오토바이 행렬이다. 인구 9600만명에 정식 등록된 오토바이 대수만 5000만대가 넘는다 한다. 신호 따위 없고, 차선이 따로 없다. 내키는 대로 간다. 심지어 역주행까지 빈번하다. 보행자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이 무단횡단이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접촉사고는 많지 않다 한다. 유독 사고가 나는 경우는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피한답시고 확 뛰어서 길을 건너는 보행자라고 한다. 불규칙한 관계 속에서도 계획된(걸어가는) 불규칙은 안전하다고 한다. 결국 돌발 행동이 문제다.
 

우려되는 트럼프의 막연한 사랑, 질주
비핵화는 ‘정교한 사랑’으로 접근해야

하노이에서 이틀간 시작되는 북미 회담이 그와 흡사하다. 미국과 북한 모두 동일 차선에 없다. 정해진 규칙도 없다. 다만 상대방이 어떤 수를 갖고 있는지, 어떻게 나올지 예상만 할 수 있다면 판이 깨지지는 않는다. 관건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예기치 못한 질주가 우려되는 이유다.
 
이번 2차 하노이 회담은 사실상 트럼프-김정은의 담판이다. 미 행정부 내에서 ‘덜 영근’ 2차 회담에 적극적이었던 건 트럼프 뿐이었다. 비건 대북특별대표는 사실 메신저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실제 지난 6일부터 2박 3일 평양을 가서도 아무것도 진전시킬 수 없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도·감청 우려로 트럼프의 ‘훈령’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이를 알고도 비건을 평양에 보냈다. 진정한 ‘협상가’는 자신 한 명으로 족하다 생각하는 게 트럼프다. 결국은 자신과 김정은의 담판으로 본다. 하노이로 향하는 비행기에 타기 직전 “나와 김정은 위원장은 ‘어떤 것’에 대해 (하노이에서) 얘기를 나눌텐데, 솔직히 김 위원장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얘기도) 소리 내 할 것”이라 털어놓은 대목이 트럼프의 본심일 게다.
 
지난해 6월 싱가포르 회담 이후 8개월여 동안 북미 관계를 돌이켜보면 말은 요란하고 이벤트는 많았지만, 진전은 없었다. 워싱턴엔 좌절감과 비관론이 가득하다. 그런 가운데 지난 대선 과정에서 트럼프와 러시아의 유착을 수사한 뮬러 특검팀이 이르면 다음 주 최종 보고서를 내놓을 예정이다. 기세등등한 민주당은 당초 8월부터 시작하려던 대선 출마 후보자(현재 12명이나 된다) 간 토론회를 대폭 앞당긴다고 한다. 물론 트럼프 외교정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트럼프가 ‘유일한 희망’으로 삼는 이번 하노이 회담에서 어떻게든 ‘홍보용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이유이자, 우리로선 과속질주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급함은 사고(事故)를 부른다. 사고보다는 ‘약속된 지각’이 낫다.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1930년대 사이공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도차이나’. 베트남이 해방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그린 역사 영화다. 프랑스 해군 장교를 놓고 사랑싸움을 벌이는 엘리안느와 베트남 소녀 카미유의 대화. “그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난 죽을 거야”(카미유), “근데 그도 너를 사랑하니?”(엘리안느), “그럴 거야, 난 확신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어?”,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어.”
 
김정은의 숙소 하노이 멜리아 호텔 1층 로비에서 이 칼럼을 쓰며 문득 떠오른 이 대사. 카미유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빗나갔다. 비핵화도 다를 게 없다. 막연한 사랑만으로 접근하다간 핵심과 원칙을 빗나가게 할 수 있다. 혼자 확신해선 곤란하다. 정교한 사랑이 필요하다.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는 트럼프. 하노이의 ‘사랑과 비핵화’는 어떤 결과로 끝날 것인가. 기대해 본다. <하노이에서>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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