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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랑 넘치던 주방, 딸도 그런 공간으로 기억할까

중앙일보 2019.02.26 11:00
[더,오래]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9)
신혼집이 생기면서 가장 새로웠던 점은 나의 주방이 생겼다는 것이다. 낡은 전셋집이었다. 싱크대가 정말 너덜너덜할 정도로 오래돼 새 것으로 바꿨다. 원룸에나 들어갈 법한 작은 싱크대였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나는 그릇 세트, 혼수 세트 같은 것은 사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조금 사고, 친정엄마가 갖고 있던 새 것으로 채웠다. 작은 싱크대에 친정 오빠가 사준 가스레인지도 놓았다. 결혼 전엔 집안일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친정엄마는 늘 “네가 하면 어설퍼서 마음에 안 들어 저리 가” 라거나 “시집가면 실컷 할 텐데, 엄마 밑에 있을 땐 하지 마”라고 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결혼과 동시에 생긴 나의 주방
정말 엄마의 집안일을 거의 도와주지 않은 철부지로 30년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결혼과 동시에 생긴 나의 작은 주방을 나는 좀처럼 잘 쓰지 못했다. 정리도 어설펐고, 구색을 갖춰 예쁘게 상 차릴 줄도 몰랐다. 결혼 전 엄마가 차려 준 대로 작은 접시들에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을 조금씩 덜어놓았는데도 어쩐지 엄마가 차려준 밥상 같지 않고 맛도 모양도 엉성했다.
 
금세 더러워지는 가스레인지는 신랑이 늘 닦아 주었고, 설거지조차 물기를 탁탁 빼 가지런하게 건조대에 올리는 것도 늘 어설펐다. 그러다 아이를 낳았고 주방은 폐업 수준으로 방치했다. 혼자 밥 먹는 날이 많은 나는 거의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다 신랑이 퇴근길에 사 오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내가 결혼 한 후 인테리어를 하고 이사를 한 번 한 친정엄마의 새 집, 새 주방은 깨끗하고 넓었다. 결혼 전 살던 집엔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이제는 남의 집인 듯 어디에 냄비가 있고 어디에 식용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엄마의 살림을 뒤지고 음식을 만들고 꺼내 먹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엄마 프라이팬은 어디에 있어”라고 물었고, 살살 꺼내 살살 쓰고 제자리에 놓았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아이가 이유식을 하게 되자 나는 주방을 다시 개장했다. 난생 처음 이유식을 만들게 된 내게 믿을 곳은 검색뿐이었다. ‘이유식 준비물’이라고만 검색해도 무수히 쏟아지는 준비물과 곱게 차려놓은 이유식 사진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애정없는 엄마, 정성 없는 이유식이 될 것 같아 이것저것 사들였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지금 생각하면 ‘좋다더라’는 게 대체 누구한테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 ‘엄마 눈에 예쁘더라’, ‘사진 찍어 올리기 좋다더라’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한창 이유식 때문에 해본 적도 없는 고기를 갈고 채소 육수를 내고 믹서기를 돌리고 거름망을 내리고 소분하는 일까지 아이가 아니면 절대 할 일 없을 일을 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느 날 친정에 가 아이 이유식을 덜어 놓을 그릇이 없어 엄마의 주방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주부 9단인 엄마의 주방은 참 단정하고 깨끗했다. 오래된 것도 쉽게 버리지 않고 구석구석 잘 넣어놨는데, 익숙한 밀폐 용기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아기나 쓸 법한 작은 사이즈에 도자기로 된 밀폐 용기로, 빼곡하게 중장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유식을 담기 딱 좋은 사이즈였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그 그릇은 내가 20대 시절 직장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녀야 한다고 하니 어느 날 엄마가 백화점에 가서 “이것 좀 봐. 너 이런 거 좋아하지? 도시락 싸서 다닌다고 해 엄마가 너 주려고 샀지. 예쁘지?”라며 사 온 것이었다.
 
누가 봐도 유아용인 그릇을 엄마는 내 취향이라고 사 왔고, 한동안 아침마다 다 큰 딸 도시락을 싸주었다. 기억이란 참 신기하다. 그 그릇 하나로 그날 엄마의 옷, 엄마 손에 들려있던 백화점 쇼핑백, 그날의 날씨 같은 게 머릿속에 훅하고 들어왔다가 훅하고 지나간다.
 
엄마의 주방서 찾은 20대 쓰던 도시락 그릇
엄마는 그 도시락 그릇에 먹고 싶다고 하면 장을 봐와서 싸줬고 한 번도 귀찮다거나 “네가 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지금처럼 예쁘게 싼 도시락에 해시태그(#)를 붙여 #집밥 #딸내미도시락 #집스타그램 같이 누군가에게 과시하고 자랑할 일이 없음에도 매일 아침 묵묵히 도시락을 싸주었다. “맛있어 보여요”, “정말 예쁘네요” 같은 댓글 하나 없어도 딸에게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 못 들어도 매일 싸주던 도시락이 새삼 고마웠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엄마는 나를 정말 사랑으로 키웠구나’, ‘대가 없는 사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멋들어지지 않아도 따뜻한 주방은 이런 것인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 #이유식 #사랑해아가야 #맛있게먹자 라며 예쁘게 세팅한 이유식을 요리 찍고 저리 찍어 올리던 나를 반성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여전히 나의 주방은 정신없고 문 여는 날이 드물지만, 먼 훗날 나의 딸도 나의 주방을 따뜻하고 사랑 넘치는 공간으로 기억해주길 바랐다. 나도 카메라 너머 밥상이 아닌 엄마의 주방을 바라보자고 생각했다. 액정 속 멋진 기록보다 아이의 마음속과 기억 속에 멋지게 기록되어 보자고 다짐했다.
 
장윤정 주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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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장윤정 주부 필진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 마냥 아이같은 막내딸로 30년을 편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준비도 없이 엄마가 된 미술전공자. 철부지 딸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그림과 글로 그려본다. 엄마에겐 딸, 딸에겐 엄마인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기록해보는 삼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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