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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3·1운동 앞장섰다가 희생된 29세 의대생

중앙일보 2019.02.26 00:02 2면
독립운동가 조명 배동석
학생을 비롯해 간호사·교직원에 이르기까지 세브란스엔 유독 국권 피탈의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애썼던 인물이 많다. 그중엔 재학 중 사망해 졸업하지 못한 안타까운 명예졸업생(2008년)도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29세의 늦깎이 의대생 배동석. 배동석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경찰에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고문은 너무 잔인해 손발톱을 비롯해 두 눈알까지 모두 뽑힐 정도였다고 한다.
1910년대의 배동석. [사진 연세의대 의사학과]

1910년대의 배동석. [사진 연세의대 의사학과]

 
배동석은 1891년 3월 경남 김해에서 지역 유지이자 한약사인 아버지 배성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위기에 빠지자 유복한 환경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다.
 
그의 첫 활동은 1907년 황태자 이은 압송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배일운동이다. 배일 혐의로 다니던 대구 계성학교에서 퇴학당한 배동석은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핵심 인물로 참여한다. 첫 행보는 대한광복회의 요청으로 만주와 상하이에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경남 마산·함안·김해 등의 지역에 배포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는 역할을 맡는다. 한 달 후인 3월 1일엔 탑골공원 시위에 참여하고 같은 달 5일엔 남대문 앞 시위에 참가한다. 김해에서 만세 시위를 하던 배동석은 현장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힌다.
 
당시 3·1운동을 주도한 대부분의 학생이 6개월 내외의 징역형을 받았다. 그런데 배동석은 독립에 대한 의지가 분명한 데다 오랫동안 활동한 경력 등으로 최고형인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독립운동과 관련한 핵심 정보를 발설하지 않고 버티다 고문으로 온몸이 망가지고 결국 결핵까지 앓게 된다. 병보석으로 풀려나지만 배동석의 당시 몰골은 그 모습을 본 부인이 실신해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세브란스는 1920년 3월, 배동석의 결핵 치료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병동인 세브란스병원 결핵병사를 세운다. 하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배동석은 결국 사망한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신윤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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