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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감 키운 적폐청산, 좋은 정치는 안 하듯 하는 ‘무위이치’

중앙선데이 2019.02.23 00:20 624호 27면 지면보기
빠른 삶, 느린 생각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얼마 전 미국의 한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친지로부터 e메일을 받았다. 개인적인 이야기에 더하여, 시대에 대한 느낌을 전하는 말이 있었다. 그는 오늘의 시대를 전반적으로 평가하여 ‘불신·증오·두려움·불안의 시대’라고 했다. 그래도 미국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나라이고 특히 그가 살고 있는 중서부의 미국은 전원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일 텐데, 시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그가,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정치 이데올로기에 편향되는 것도 아닌 성실한 인문학자라는 것을 감안할 때, 사회를 널리 돌아보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느낌을 종합하여 말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얼핏 갖는 사회의 전체적인 상황과 삶의 일상적인 조건 그리고 그것이 느끼게 하는 느낌 사이에는 미묘한 복합적인 관계가 있다. 어떤 체제이든지 간에, 정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힘이 힘으로 작용함이 느껴질 때, 그것은 삶의 분위기를 살벌하게 한다. 그리하여 예로부터 좋은 정치는, 정치하지 않는 것처럼 정치하는 것, 무위이치(無爲而治)라는 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불신·증오·두려움·불안의 시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갈등도
힘의 경쟁과 인간애 균형 이뤄야

정의도 정치 이슈 땐 적대감 변질
희망의 미래 위한 절제술이라지만
스페인 대사면령처럼 관용 있어야

얼마 전에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정 연설을 보면, 자신이 고용, 임금, 의료, 빈곤층의 문제 등 국가의 경제·사회·문화 여러 분야에 책임을 질만 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짧은 임기 동안 그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언급하는 것이 있다. 객관적 지표에서도 미국의 경제가 매우 좋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저돌적 보수주의자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에는 내리 밀리고 있다고 느끼는 중산층, 좁혀 말하며 주로 백인들로 이루어진 중산층의 지지가 컸다고 한다. 그는 사회 전체에 대한 그들의 계층적 분노를 자극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국제적인 경쟁이 심해지는 세계화되는 세계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되게 하고 다른 나라들에 우선하게 하는, ‘첫째’가 되게 하는 데에 총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의 국정 연설에서도 이런 점들이 되풀이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돌적으로 주장되는 미국 제일주의는 국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독일에서 뮌헨안보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서방세계의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한다는 취지로 1963년에 시작됐다. 이 회의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이제 국제 질서가 쇠퇴하고 파괴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발언이 많은 주의를 끌었다. 이 회의를 이끄는 독일 외교관 출신의 볼프강 이싱어 의장은 “이제 산산조각이 난 국제 질서를 어떻게 하나로 묶어 낼 것인가, 그것이 새로운 과제”라고 말하였다. 이 회의를 넘어서도 국제 질서의 문제는 여러 나라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마음에 중요한 관심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영국 BBC 뉴스에는 “문명은 이제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것인가?” 하는 긴 논술이 있었다. 진단이 어떤 것이 되었든, 제목만으로도 지금까지 문명으로서의 통일성을 가지고 있던 국제 질서, 물론 미국과 서구 중심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다는 일반적 느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간 연대 갈수록 산산조각 나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제일주의가 이러한 느낌을 자극했다고 할 수도 있고, 또는 그러한 ‘몰락’의 예감이 그의 생각을 자극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민족 또는 국가의 이념은 쉽게 국가 간의 갈등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한 생각의 틀 안에서는 질서로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이고, 그것을 넘어가는 정치 단위에 대하여는 아무런 마련도 존재하지 않는다. 냉전 체제하에서 여러 국가들은, 한계가 있기는 하였지만, 연대 관계를 가졌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이상과 가치였다. 민족주의 국가주의는 그러한 초국가적인 이념과 그에 기초한 결속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전의 칼럼에서 본 필자는, 동서냉전체제의 이념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를 국가 단위 권력의 기구로 보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역설적으로 북한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는 견해를 말한 바 있었다. 이것은 이념과 현실의 복합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건이나 이념은 당초에 예상하는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주의에 따르는 부작용의 하나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보편적 사고와 그것에 뒷받침되는 보편적 가치와 이상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 지상주의가 반드시 갈등과 전쟁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국제 정치에서 잘 알려진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이 있다. 그것은 국가들의 힘이 서로 일정한 균형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전쟁의 위험을 피하게 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세계 평화는 이러한 힘의 균형을 넘어가는 그 자체의 목적이고 이상이다. 그러한 이상의 실현은 보다 높은 단계의 인간성 실현을 수반한다. 이에 대하여 자기의 나라를 첫째가 되게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이면서도 조악(粗惡)한 인간성을 나라의 구성 원리로 삼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국제 사회에서의 인간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 중심주의, 이기주의가 국가 내의 질서에서 정치 원리, 삶의 원리가 된다면, 그러한 질서가 참으로 인간적인 질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에 말한 국제 문제에 대한 조감은 우리나라 안에서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서론으로 삼으려 한 것인데, 너무 길어졌다. 민주주의 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나라이다. 그 근간이 되는 것은 법치이다. 거기에서 심리적 동기는 좋은 의미에서는 모든 개체적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다. 현실적으로는 심리적 동력으로 상호 간의 시의(猜疑)와 경쟁심도 작용한다. 사회에는 사람이 사람에 대하여 늑대가 되게 하는 힘의 갈등도 있다. 그리하여 사회 계약 또는 힘의 균형의 타협이 불가피하고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태어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회를 하나로 유지하는 것은 인인애(隣人愛) 또는 인간애이다. 이것은 경쟁적 인간관계가 만들어 냈던 사회 협약 그리고 ‘힘의 균형’을 넘어 인간의 삶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현실은 힘의 경쟁과 인간애 두 개가 겹쳐서 하나의 질서로 유지된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심리 동력은 저울대처럼 어느 한 쪽으로 기울게 되는 일이 많다.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에 대한 느낌은 다른 것이 된다.
 
우리 사회에서 큰 사회적인 문제는 사회 정의의 문제이다. 정의의 문제에도 위에 말한 심리적 동력들이 작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이슈가 될 때, 정치는 투쟁적인 상황에서 힘을 얻기 때문에, 동원되는 것은 부정의 동력이 되기 쉽다.
 
 
정의 실현에 긍정적 비전 보여줘야
 
현 정부의 모토가 되어 있는 ‘적폐청산’은 반드시 정의의 문제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공공질서에 누적되는 문제점들을 척결하여 그것을 보다 공정한 것이 되게 하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정치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은 부정적인 심리이기 쉽다. 그리하여 조성되는 사회적 삶의 느낌은 어두운 것이 될 수 있다. 적폐청산의 대상이 된 사람들의 모습 자체가 그러한 느낌을 조성한다. 힘을 활용하는 입장에서 그것은 보다 희망적인 미래를 위한 절제 수술이 되겠지만, 그것이 지속하는 목표가 될 때, 그것은 인간관계와 삶 일반에 대한 적대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것이 특히 정치 집단 간의 갈등에 연결될 때 더욱 그렇다.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면, 그것은 수술을 넘어 보다 건강한 상태, 보다 인간적인 질서에 대한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용서와 관용과 화해와 신뢰를 포용하는 삶의 희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얼마 전 자리에서 유종호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에는 대통령직을 맡았던 사람들이 연속해서 감옥에 가야 하는 사회가 건전한 민주 사회일 수 있는가 하는 회의를 표현하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반드시 처벌 집행자나 처벌 대상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범죄적인 인물로 처벌을 받게 되는 사람들을 지도자로 선출하는 국민은 어떤 국민인가. 유 교수의 물음에는 그러한 일이 쉼 없이 일어나는 나라가 민주주의를 할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인가, 그것을 뒷받침하는 문화와 윤리가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되풀이하여 말하건대, 어떤 상황에서의 정의의 추구는, 그것이 보다 포괄적이고 긍정적인 도덕적 윤리적 비전에 뒷받침되지 않을 때, 삶의 공동체에서 인간적 품격을 삭제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울하게 하는 것은 정치 세계에 벌어지는 일만이 아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도되는 증오와 폭력의 사건, 부모·자식, 형제, 애인 간을 포함하여 사회에 넘쳐 흐르는 듯한 살인·폭력·절도·횡령·사기 등 참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이다. 갈등과 증오의 사건은 이웃이나 공공장소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 대한 조사에서 한국이 사회적 신뢰도가 가장 낮은 나라라고 보고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정치계에서의 여러 분규도 이러한 불신 또는 갈등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한 몫을 한다. ‘불신·증오·두려움·불안의 시대’라는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지인의 e메일과 같은 때에 나는 또 하나의 e메일을 마침 스페인을 방문하고 있는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스페인의 부드럽게 인간다운 사회 분위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스페인의 정치사에 언급하고, 프랑코 독재를 종말에 이르게 한 새 정부가 대사면령을 내어 많은 프랑코 체제하의 정치 동참자들을 사면하였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것이 스페인 사회를 다시 인간적인 사회가 되게 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이 지인이 스페인에서 들은 이야기의 하나였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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