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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그녀를 여신으로 추앙하는 내 마음 속엔…

중앙일보 2019.02.22 08:00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2화

맛없는 병원 밥을 먹고 잠을 청하는데 낮 상황이 계속 목에 걸린 가시 같았다. 장 팀장이 예고 없이 방문하는 바람에 누나와 우연히 마주쳤고, 그때 내가 전혀 자연스럽게 대처하지 못했다. 두 사람 다 나의 어색함을 읽고도 남았을 테다. 문제는 결국 나였다. 내 마음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셈이다. 누나에게 바짝 붙어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두 사람 중간 어디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6개월간 누나와는 이메일 통신마저 멎은 상태였다. 누나는 어느 정도 휴지기가 필요하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인정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직장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장 팀장과 이런저런 일로 접촉할 기회가 있었고 마침내 사귀자는 그녀의 제안을 받기까지 했다.
 
나는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비교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비난받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인지상정 아닐까. 식욕, 성욕만큼은 아니더라도 비교본능 또한 강한 거니까.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비교하지 말고 각각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라고 하지만 그건 교과서 같은 소리일 뿐이다.
 
누나와 장 팀장은 정말 여러모로 달랐다. 나이, 성격, 결혼관, 현재의 직업 등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객관적인 점수로 보면 장 팀장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누나는 힘든 사람이라는 사실이 장서희와 만나면서 확연히 입증되었다. 장 팀장과 있으면 기분이 밝아지는데 누나는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누나를 여신으로 추앙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조금씩 지쳐갔던 것 같다.
 
당장 어느 쪽인지 결정해야 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 숙제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누나에게 이메일을 썼다. 출근은 못 해도 회사 메일을 체크해야 했기 때문에 입원할 때 가져온 노트북을 열었다.
 
-누나, 오늘 문병 와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사실 별 기대 안 했는데. 그리고 이렇게 빨리 올 줄도 몰랐어요.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누나가 날 많이 생각하는구나 했죠, 맞죠? ㅎㅎ그리고 정말 할 말 있어요. 핸드폰요. 교통사고 같은 위급 상황도 바로 알릴 수 없었잖아요? 그러니 이젠 알려주세요. 낮에 만난 장 팀장에게도 누나가 여친이라고 했는데 아직 핸폰 번호도 모른다고 하면 당연히 농담 말라고 할 거예요.
 
메일을 보내고 나서 시계를 보니 새벽 3시쯤이었다. 다음날 오전 받은 메일은 날 상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문병 올 걸 기대도 안 했다고? 다쳐서 회사도 못 가고 병원에 있다는데 내가 안 올 줄 알았다고? 내가 좀 차갑고 까칠하긴 해도 그렇게 경우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핸폰 번호를 몰라 당시는 연락할 수 없었겠지만 입원하고 나흘 만에 이메일을 보낸 건 뭐야? 그게 가장 이른 시간이었던 거야?
 
우리 사이를 매우 얕게 평가하는 나를 타박하는 투였다. 난감했다. 이런 답장은 예상도 못 했는데….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두 사람을 인사시켜 주면서 내가 어색해했던 장면 말이다. 장 팀장과 아무 사이가 아니라면 그렇게 버벅댈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나는 해명성 짙은 메일을 다시 썼다.
 
-문병 올 걸 크게 기대하지 않은 것은 누나의 성격을 나름 그렇게 파악했기 때문이에요. 마음은 많이 쓰는 거 알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건 싫어하잖아요. 내가 우리 관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에요. 누나가 좋아하는 일을 하기보다는 싫어하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게 누나를 아끼는 내 마음이었어요.
 
입원 나흘 만에 이메일을 보낸 건 상황이 대충 수습된 뒤 좀 여유가 생긴 게 그때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 본래는 하루 이틀 뒤 퇴원을 예상했고, 퇴원한 뒤 연락하려 했는데 적어도 1주일은 있어야 하기에 뒤늦게 메일을 쓴 거죠. 괜한 오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다음 답신은 없었다. 빨리 퇴원하고 싶은데 허리 부위는 쉽게 낫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괜히 서두르다 나중에 다시 도질 수가 있으니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라고 충고했다. 
 
하지만 대낮에 병실에 편히 누워 뒹굴 배짱 있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달리 방법은 없었다. 엄마에게는 병원에 오지 못하게 했다. 간단한 교통사고 후유증이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상대 보험사에서 간병인까지 붙여준다고 거짓말도 해둔 상태였다. 그럼에도노심초사하실 게다. 엄마니까.
 
누나에게 자꾸 미안한 마음이…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생각이 깊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을 혼자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산을 가도 혼자 가는 사람이 있다. 병원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 것도 그 비슷했다. 병원에선 생각이 깊어지기보다는 많아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여행이나 등산처럼 상황을 즐길 수 있지는 못하니까.
 
여하튼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4인 병실이라는 현실이 그 자유를 종종 침해했지만. 멀쩡해 보이는 청년이 혼자 누워있으니 다른 환자 보호자들이 과일도 챙겨주고 말도 걸어주었는데 그게 더 불편할 때가 많았다. 간섭받기 싫어 일부러 자는 척하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마음의 등불만 켜고 생각의 날개를 펴면 한도 끝도 없었다. 11살 때 아버지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중학교 시절 엄마 따라 교회 다니면서 만났던 여학생들을 지금 다들 어떻게 살고 있을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무엇보다 베트남으로 이전하는 회사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내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지금 내 마음을 이리저리 당기고 있는 두 여자도 그 결정 이후의 산물이니까.
 
서른아홉, 작년까지만 해도 느긋했는데 올해 들어서는 확실히 달라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날 지배하는 단어는 결혼임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사실 ‘어쩌다 총각’이지 독신주의자나 비혼주의자는 아니다. 작년 여름 도서관에서 누나를 알게 되고, 새해 새 직장에서 장 팀장을 만나면서 어느새 선택은 둘 중 하나로 좁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고민은 혼자만의 것일 수 있다. 누나는 여전히 결혼문제에 대해 부정적이다. 장 팀장은 먼저 사귀자고 할 만큼 적극적인 의사 표현은 했지만 내가 여친이 있다고 말한 뒤에는 없던 얘기로 돌리고 말았다. 그럼에도장 팀장은 낮이든 퇴근길이든 하루 한 번은 들렀다.
 
물론 저번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늘 방문에 앞서 문자를 보냈다. 그녀에겐 자주 올 명분이 있는 것 같았다. 둘이 술 먹고 난 뒤 일어난 사고니까. 문제는 그녀가 자주 올수록 누나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내 심리였다.
 
-나는 정말 누나에게 미안한 짓을 하고 있는 걸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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