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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30년 전 히로히토에 절한 ‘긴다이추’ 에게 배워라

중앙일보 2019.02.21 00:22 종합 28면 지면보기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틈만 나면 자유한국당을 ‘친일파 후예 소굴’이라 비난하는 더불어민주당이지만 그쪽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당장 서열 2위인 홍영표 원내대표부터 친일파 후손이다. 그의 조부 홍종철은 ‘일제에 부역하고 작위를 받은 혐의’로 친일인명사전 704인 명단에 올라있다. 홍영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유감의 뜻을 표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건 진보진영의 반응이다. “민주화 운동 등으로 조상의 죄를 충분히 뉘우쳤으니 아무 문제 삼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만약 한국당 원내대표가 친일파 후손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의정활동을 잘하고 보수 개혁에 앞장섰어도 툭하면 “친일파 후손 주제에”란 비난이 쏟아졌을 것이다.
 

식민 지배 원흉 빈소 찾아 깊숙히 애도 … 국익 위한 용단
일본, 김대중 구명 앞장 … 이젠 외눈박이 대일관 벗어나야

‘내로남불’의 전형인 민주당의 친일·항일 편 가르기 프레임은 당의 최고 어른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화끈한 ‘친일’ 전력을 보면 모순이 일거에 드러난다. 딱 30년 전인 1989년 1월 9일. 88세를 일기로 숨진 히로히토 일왕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을 찾아 깊숙히 절한 정치인이 있었다. 당시 제1야당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이었다. 히로히토는 일제의 조선 침략 최고 원흉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고문해 숨지게 하고 할머니들을 위안부로 끌어간 장본인이다. 오죽 치가 떨렸으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임종하면서 “히로히토 네놈이 큰 죄를 지었구나”란 유언을 남겼을까.
 
그 히로히토의 빈소에 김대중은 허리를 굽혀 진하게 애도의 뜻을 표했다. 그 장면은 경향신문 카메라에 담겨 보도됐다. 민주당은 홍준표 등 한국당 정치인들이 아베 총리를 만났을 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며 “친일파 DNA가 어디 가나”고 비아냥댔다. 고개 숙인 각도로 친일 여부를 측정한다면 김대중은 단연 ‘슈퍼 친일파’감이다. 뿐인가. 대통령이 된 뒤 일왕을 ‘천황’이라 부르자고 한 정치인도 김대중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김대중의 ‘친일’엔 역사가 있다. 일본 정부는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아래에서 김대중이 사형 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의 선봉에 섰다. 일본 정계 막후 실력자 세지마 류조는 선고의 부당성을 지적한 사쿠라우치 요시오 일본 외무상의 편지를 들고 전두환을 만나 “김대중씨를 죽여선 안 된다. 큰 국제문제가 된다”고 압박했다. 일본 외무성도 전두환 5공 정부에게 “비공개된 김대중 사형 선고 판결문을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판결문의 허점을 찾아 선고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는 노력이었다.
 
심지어 일본 외무성은 81년 8월 10일 “전두환 체제는 군사파쇼 정권이며, 김대중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을 돕는 건 그 나라 민주화 흐름에 역행하는 납득할 수 없는 자세”라는 공문서까지 작성했다. 또 북한 요인 현준극 노동당 중앙위원을 보란 듯 도쿄에 초청해 5공을 자극했고 전두환의 숙원인 100억 달러 차관 성사도 ‘김대중 구명’이 선결 조건임을 암시했다. 결국 5공은 미국에 이은 일본의 이런 전방위 공세에 두 손을 들었다.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미국행 망명까지 허락한 것이다. “긴다이추 센세이(김대중 선생)를 석방하라”고 목타게 외쳤던 일본 정치인들과 시민단체는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 청와대 586들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들의 어른 김대중이 5공의 사형 칼날을 벗어나 민주화 주역으로 화려하게 재기한 데엔 일본의 역할이 컸던 게 엄연한 사실이다.
 
‘긴다이추’는 일본의 비중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려 노력했던 거인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보수 정부들이 ‘왜색’이라며 금지했던 일본영화·가요의 국내 공연을 대폭 허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마음을 얻은 뒤 ‘신 한일선언’을 끌어냈고 일본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밀어주는 핵심 파트너가 됐다. 햇볕정책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는 미국의 마음을 돌리려면 대일관계부터 다져놔야 한다는 전략이 적중한 것이다.
 
한국인의 철천지원수인 히로히토 빈소를 찾아 고개 숙인 행위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이다. 김대중은 히로히토 개인이 아니라 일본을 향해 절을 했다. 그게 우리 안보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총리에게 고개를 얼마나 숙였는지, 일본 대사관 행사에 갔는지 안 갔는지 따위를 놓고 친일 여부를 재단하는 민주당 후배들을 보고 지하의 김대중 전대통령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선장이다. 야당 시절엔 보수 정부의 ‘친일 망동’을 규탄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젠 국익을 위해 정교한 대일 외교를 펼칠 책임이 막중하다. 하지만 지난 1년 반 정부가 한 일을 보면 일본 욕만 하면서 행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토’( No Action Talk Only) 행태뿐이다. 일본을 국내정치에 팔아먹으며 지지율 유지 도구로만 쓰겠다면 그렇게 하라. 그럴수록 민주당과 정부는 김대중이 닦아놓은 위대한 한일관계의 유산을 망쳐놓을 뿐이다. 대북정책도, 경제도 이웃 일본과 관계가 든든하지 않으면 언제든 치명상을 입을 수 있음을 유념해주길 바란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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