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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가 되지 못한 '미생' … 스피릿을 소개합니다

중앙일보 2019.02.19 13:22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15)
위스키가 세상에 나오려면 오크통에서 숙성돼야 한다. 스코틀랜드에선 최소 숙성 기간을 3년으로 정해놨고, 다른 나라들도 비슷하다. 따라서 신생 증류소는 위스키 생산을 시작해 최소 3년 동안 판매할 수 있는 위스키가 없다. 증류소를 짓는데 드는 비용은 엄청난데, 3년 동안 매출이 없는 사업인 셈이다.
 
2008년 가동을 시작한 일본 치치부 증류소. 작은 증류소지만 초기 투자비용은 수십 억 원에 달한다. [사진 김대영]

2008년 가동을 시작한 일본 치치부 증류소. 작은 증류소지만 초기 투자비용은 수십 억 원에 달한다. [사진 김대영]

 
위스키 증류소는 이 사업 초기의 ‘기근’을 해소하고자 숙성 전의 스피릿을 팔고 있다. 몰트 발효액을 증류해서 얻은 투명한 액체를 스피릿이라고 하는데, 보통 알코올 도수가 60도에 가깝다. 이 스피릿이 오크통에 들어가 숙성을 거치면 위스키가 된다. 스피릿은 보리 품종, 피트 처리, 발효 시간, 증류기의 형태 등 다양한 요소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따라서 위스키 증류소마다 위스키 맛이 다르듯, 스피릿 맛도 모두 다르다.
 
스피릿은 60도에 가까운 도수를 자랑하기 때문에 굉장히 자극적이다. 혀가 아릴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기도 한다. 풀 내음, 피트향, 몰트의 구수한 맛, 알코올의 찌르는 맛, 비릿한 맛 등 다양한 맛이 있다. 뜨거운 증류기에서 나온 직후의 것이라 맛이 정돈되지 않고, 자기주장에 바쁘다. 이런 맛들이 오크통 숙성으로 제 갈 길을 찾는 것이다.
 
일본 신생 증류소의 위스키 스피릿들. [사진 김대영]

일본 신생 증류소의 위스키 스피릿들. [사진 김대영]

 
위스키 스피릿은 그 스피릿으로 만든 위스키와 함께 마셔볼 때 진가를 발휘한다. 위스키는 숙성 과정을 거치며 오크통의 영향을 많이 받아 스피릿 고유의 맛은 점점 잃어간다. 하지만, 겹겹이 쌓인 맛의 층 어딘가에 스피릿 맛은 존재한다. 스피릿을 맛보고 위스키를 마시면, 보다 확실히 위스키 스피릿 맛을 찾아낼 수 있다. 화려한 위스키의 향과 맛에서 특정한 맛의 기원을 찾는 재미는, 종종 술에 취하는 기쁨보다 클 수도 있다.
 
규정된 숙성 기간을 채우지 않고 출시되는 위스키 스피릿도 있다. 짧게는 1개월에서 3년이 되기 직전까지 다양한 스피릿이 존재한다. 숙성 과정을 배제한 스피릿과는 달리 짧게라도 오크통에서 숙성이 됐기 때문에, 제법 오크통에서 온 맛들이 담겨있다. 위스키 증류소에서 근무하는 이들만 맛볼 수 있는 숙성 중의 스피릿이 상품화되는 건, 숙성에 따른 스피릿의 변화가 궁금한 위스키 팬들에겐 참 반가운 일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 새로 생긴 증류소, ARDNAMURCHAN. 채 3년 숙성이 안된 스피릿의 병 표면에는 보리 품종부터 숙성 오크통까지 다양한 정보가 빼곡히 담겨있다. [사진 김대영]

2014년,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역에 새로 생긴 증류소, ARDNAMURCHAN. 채 3년 숙성이 안된 스피릿의 병 표면에는 보리 품종부터 숙성 오크통까지 다양한 정보가 빼곡히 담겨있다. [사진 김대영]

 
스피릿의 최소 숙성기간을 채웠는데도 위스키 이름을 버리고 스피릿으로 살아가는 술도 있다. 네덜란드의 ‘켈프(CELP)’라는 술도 그중의 하나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업계는 스피릿에 다른 첨가물을 넣으면 위스키로 인정하지 않는데, CELP는 스코틀랜드 아일라 지역 위스키에 해초를 넣었다. 아일라 지역의 스모키한 위스키에 해초의 바다 내음을 더하면 더 맛있을 거라 본 거다. 위스키란 이름을 버리고 스피릿이 되었지만, 독특한 맛으로 위스키 팬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
 
네덜란드의 스피릿, CELP. 병 안에 해초가 담겨 있다. 스모키한 맛과 바다내음이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사진 김대영]

네덜란드의 스피릿, CELP. 병 안에 해초가 담겨 있다. 스모키한 맛과 바다내음이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사진 김대영]

 
스피릿은 결코 맛이 없고, 위스키는 위스키라야 맛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성공한 인생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았듯, 맛있는 위스키도 처음부터 맛있는 술은 아니었다. 우리가 늘 궁금해하는 건, 성공한 자의 현재보다 그가 걸어온 길이다. 스피릿은 모든 위스키가 걸어왔고, 지금도 걷고 있으며, 앞으로도 걸어갈 길이다.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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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필진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 위스키 덕후이자 싱글몰트 위스키 블로거다. 위스키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위스키와 위스키 라벨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위스키에 대한 지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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