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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세계의 변화와 운동성

중앙일보 2019.02.19 00:16 종합 28면 지면보기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마치 평소에는 바닥을 걷다가 커다란 구멍을 발견해야만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는 그리스신화 속 커다란 새와도 같다.” 백남준에게 “커다란 구멍”은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이었다. 그에게 모든 클리셰(cliché)들은 넘어 날아오르지 않으면 안 될 구멍이었다. 그는 예술가로서 생존하기 위해 진부한 형식의 구멍들을 뛰어넘었다. 그가 참여했던 전위예술 운동 그룹의 이름도 “플럭서스(Fluxus)”였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영어 단어 “플럭스(flux)”도 “끊임없는 변화, 유동”을 의미한다. 백남준은 「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에서도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는 세계의 본질이 ‘변화’와 ‘운동’에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빨리 감지했다. 그가 「임의접속정보」라는 글에서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의 “미래”란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시간, 그러나 예술가에 의해 앞당겨지는 시간이다. 예술가는 변화와 운동의 탈주선(脫走線)을 타고 서둘러 ‘미래’로 넘어간다.
 

세계는 끊임없이 진화해 어제의 진리가 항속성 없어
이념 구실로 한 어떤 정책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세계의 변화와 운동성은 그 자체 세계의 속성이므로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움직인다. 어제의 진리가 항속성을 보장할 수 없는 이유도 어제가 오늘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 직전의 붓다가 제자들에게 남긴 유언도 “모든 것은 변한다. 끊임없이 정진하라”였다. 모든 것이 변하는데 한반도의 정세 역시 예외일 리 없다. 지금 한반도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싫든 좋든 이념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국가 이데올로기 장치에 의해서도 이제 국민은 세뇌당하지 않는다. 그 어떤 강력한 ‘빅 브라더’가 있을지라도 이제 무한대의 매체들이 생산하는 무한대의 정보들을 독점할 수 없다. 시스템은 이제 더 이상 가치를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처럼 대중의 의식을 조작하거나 통합할 수 없다.
 
대중은 실뿌리처럼 무한히 뻗어 나가는 정보와 가치의 세계 위에서 저마다 다른 좌표들을 점유하고 있으며, 그 어떤 이념의 그물망에 의해서도 포획되지 않는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이념의 전쟁이 이제 종말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는 어떤 식으로든 절대적인 ‘중심’을 설정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강제하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중은 그런 폭력적 로고스를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낡은 ‘빅 브라더’들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변하는 것은 이념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만이 아니다. 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도 끊임없이 변한다. 적대적 이념으로 더 이상 생존이 불가능할 때,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쌍방의 몰락을 의미할 때, 당사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협상의 카드는 무궁무진하다. 베트남 전쟁은 2차대전 이후 초강대국이었던 미국의 자존심에 먹칠을 한 사건이다. 그곳에 미국의 대통령이 소위 ‘평화 회담’을 하러 간다. 그것도 자신들이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던 북한의 정부 수반을 만나러 간다. 물론 평화로 가는 길은 예상외로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념을 구실로 한 어떤 외교적 태도나 정당의 정책들도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니 “우파”니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기표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모든 시도들은 시대착오적이며 자신을 아포리아로 몰아넣는 행위이다. 그것은 스스로 대안과 출구를 잃은 집단임을 자인하는 태도이다. 정책적 컨텐츠가 없는 집단들이 낡은 이데올로기의 유령을 끌어들인다. 왜냐하면 그것 외에는 내놓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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