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책은 되도록 설렁설렁” 은퇴 후에야 깨우친 공부법

중앙일보 2019.02.18 11:00
[더,오래] 박헌정 원초적 놀기 본능(17)
평소에 관심 분야를 갖고 꾸준히 공부하는 은퇴자들이 많다. 공부의 목적은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일 것 같다. [사진 서울시 50 플러스 포털]

평소에 관심 분야를 갖고 꾸준히 공부하는 은퇴자들이 많다. 공부의 목적은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일 것 같다. [사진 서울시 50 플러스 포털]

 
은퇴 후 계획을 물으면 그동안 못했던 공부를 좀 해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직장생활에서 몸에 밴 규율이 허물어지기 전에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해서 학위를 따는 사람도 있고, 자격증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공부는 정말 노후 생활의 매력적인 아이템이다.
 
나 역시 회사를 그만둔 이후 공부를 한다. 인문학, 그중에서도 요즘은 세계사에 빠져 서유럽의 중세 봉건시대 부분을 읽고 있다. 장원, 영주, 농노, 지대(地代)… 천 년 전의 유럽 역사에 관심이 생길 줄 몰랐다.
 
학창시절부터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 세계사였다. 우리 시절에는 교과목이 스무 개 가까이 되었으니 대표적인 ‘암기’ 과목인 세계사는 시험 때마다 밤새도록 외워대야 하는 피곤한 과목이었다. 무거운 눈꺼풀 들어 올리며 그렇게 열심히 외웠건만 시험 후에는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게 다 억지공부라 그렇다. 역사란 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쌓이게 마련인데, 그리고 어차피 책에 다 적혀있는데 그걸 전부 외워야 한다니! 이해하면 안 되고 꼭 ‘외워야’ 하나? 너무 무식한 짓 같았고, 우등생이 되는 길은 참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진작에 그렇게 정나미 떨어져서 이후에도 역사책은 매번 재미없는 고대사 부분만 읽다가 포기했다.
 
쉬운 책을 골라 밑줄 치고 메모해가며 읽다 보면 어느 틈엔가 여러 책의 내용이 서로 만난다. 그러니 처음부터 뭔가를 달달 외우고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사진 박헌정]

쉬운 책을 골라 밑줄 치고 메모해가며 읽다 보면 어느 틈엔가 여러 책의 내용이 서로 만난다. 그러니 처음부터 뭔가를 달달 외우고 기억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사진 박헌정]

 
이번에 세계사에 몰입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아내가 보던 일본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를 무덤덤하게 쳐다보다가 갑자기 일본의 막부시대가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1800년대 일본의 개항과정과 메이지 유신에 대한 책을 한 권 빌려 읽고 나니 대충 정리가 되었다.
 
그런데 비교적 깔끔하게 개항과 근대화를 이룬 일본에 비해 중국의 근대화는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하지 않던가. 그래서 같은 시대의 청나라가 궁금해져 두툼한 책을 한 권 읽게 되고, 내친김에 유럽까지 넘어가서 근현대사 책을 한 권씩 읽고는 이제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영화 한 편으로 제대로 동기를 찾은 결과다.
 
공부라고 해봐야 책을 쭉 읽고 중요한 내용을 노트에 정리해서 한 번씩 더 보는 것인데, 생각보다 재미있어 6개월 넘게 붙잡고 있다. 반년이면 논문이라도 한 편 나올만한 시간이지만 생각보다 큰 진전은 없다. 그런데 즐겁다. 나에게 적합한 공부방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50대에 들어섰으면 예전 방식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부모님이 내게, 또는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설렁설렁해서야 공부가 되겠냐?"고 잔소리하던 때를 기억해서 '그런 식으로 설렁설렁' 공부해야 한다. 책 보다가 커피도 타 마시고, 강아지와 놀아주고, EBS에 비슷한 내용이 나오면 조금 쳐다보고, 카톡 왔는지 살펴보고… 아, 가끔은 아내 눈치 살피며 집안일도 좀 거들어야 한다.
 
나이 들수록 책을 보는 데 있어 핸디캡이 많아진다. 돋보기가 필요하고, 눈과 머릿속 생각이 따로 움직이고, 겨우 집중해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구원받은 듯이 머리가 밝아지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죽는 날까지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서면 그 내용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평생 소주를 많이 마셔 뇌세포가 다 죽었나 싶었다. 그런데 평생 술 한 방울도 안 마신 내 친구 한모 교수가 자기도 그렇다며 위로해준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신기하고 잊기 아까워 책이나 강의 내용을 정서해서 제본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사무직으로 일하던 습관이 남아있음을 느낀다. [사진 박헌정]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신기하고 잊기 아까워 책이나 강의 내용을 정서해서 제본하기도 한다. 이럴 때는 사무직으로 일하던 습관이 남아있음을 느낀다. [사진 박헌정]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에는 기계보다 더 빨리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렇게 몸이 외우는 것을 ‘숙련’이라고 한다. 학교도 학생을 숙련공으로 만든다. 우리가 공부하며 외우는 것도 그렇다. 세계사 연표를 머리와 눈이 외워 시험지를 받자마자 손이 재빠르게 정답을 집도록 하는 게 ‘암기’였다. 유교 경전을 외우는 것도 그렇고 장학퀴즈도 그런 것이다.
 
그렇게 외운 십자군 전쟁이나 르네상스가 내 인생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다. 외우지 않고 ‘왜 그랬을까’를 이해했다면 유럽여행에서 뭐 하나라도 다르게 보였을 것 같다. 역사는 인간의 환경과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니까.
 
요즘 들어 책을 설렁설렁 봤더니 지루한 부분은 금방 넘어가고 재미있는 부분은 머릿속에 그려졌다. 빨리 읽을 필요도 없다. 책은 내가 이용하고 누려야 할 물건이지 일처럼 후딱 끝내거나 극복해야 할 숙제가 아니었다. 회사에서 읽던 보고서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가끔 필사(筆寫)도 한다. 필사는 가장 느린 속도의 독서라고 하지 않던가. 문장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니 나로서는 시간이 아까울 리 없다. 이제야 공부방법을 깨닫다니!
 
하기야 이 '설렁설렁' 공부법을 진작에 도입했으면 나 역시 대학 문턱에도 못 갔을 것이다. 정형화된 암기식 공부로 입시를 치렀고, 그 방법을 아이들에게도 밀어붙여 즐거워야 할 학습권을 박탈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파괴했음을 인정한다. 따라서 나는, 아니 우리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다. 할 수 없다. 억울하지만 이제라도 ‘대충’ 공부할 권리를 찾자!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