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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없는 혐오 사회, 대한민국

중앙선데이 2019.02.16 00:40 623호 1면 지면보기
[SPECIAL REPORT] 혐오 시대 
지난해 11월 13일 서울 사당동 이수역 근처의 한 주점.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이 ‘칙칙폭폭(성소수자 비하 표현)’ ‘메갈X(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 사용자를 조롱하는 말)’ 등 혐오 발언을 주고받았다.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경찰은 이들을 폭력·모욕 등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수역 사건’은 혐오가, 그리고 혐오에 대한 혐오가 폭행이란 물리적 충돌로 번진 대표적 사례다.
 
혐오가 대한민국을 갉아먹고 있다. 고령화와 다문화가정 증가, 성소수자 권익 확대, 여성의 사회 참여 증가가 뚜렷해지는 21세기에 ‘더불어’가 아닌 반목과 대립·배척의 혐오가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급기야 ‘극혐(극도로 혐오)’까지 횡행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12일 “우리 사회가 혐오 표현을 자체 정화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며 ‘혐오·차별 대응 특별추진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따르면 포털 사이트에 시정 요구한 차별·비하 표현은 2014년 705건에서 지난해 2352건으로 급증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혐오 표현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법률 규정조차 없는 게 현실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혐오를 ‘무엇인가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그 의미가 훨씬 복잡하면서도 애매하다. 김정학 인권위 혐오차별대응기획단 팀장은 “혐오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지만 뚜렷한 기준조차 없어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법적 규제 장치를 마련해야 할 정치권에서도 별다른 성과가 없다. 차별금지법은 2006년 노무현 정부 당시 인권위 권고를 받아 법무부 주도로 추진됐다. 하지만 기독교 교단이 ‘성적 지향’ 차별 금지 항목을 문제 삼아 반대했고 결국 17대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18대 국회에선 노회찬(2008년)·권영길(2011년)·김재연(2012년) 의원 등 진보정당 의원들이 차별금지법안을 발의했지만 역시 폐기됐다.
 
2016~2018년 이종걸·김부겸·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낸 혐오 관련 법안도 줄줄이 자진 철회 신세가 됐다. 국회 관계자는 “이들 의원이 법안을 발의하자 일부 층에서 거센 항의가 밀려왔고 설득 자체가 안됐다고 한다”며 “임기 내 다시 발의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엔 혐오 표현과 이에 따른 폭력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제재할 기본법조차 없는 실정이다. 단지 장애인차별금지법·방송법·문화기본법 등이 개별적으로 특정 행위를 규제하고 있을 뿐이다. 김영옥 생애문화연구소 상임대표는 “아직까진 혐오 표현이 대부분 온라인에 머물고 있지만 오프라인으로 구체화할 경우 문제가 훨씬 심각해질 것”이라며 “혐오가 혐오를 낳는 구조를 막기 위해선 혐오규제법 제정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도 인종·종교적 혐오와 성차별 등이 심각한 사회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유엔은 이미 1966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CCPR)’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이를 제한할 수 있는 조항을 명시했다. 19조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권리를 보장하고 있고 20조는 민족적·인종적·종교적 혐오를 금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선진적인 제도를 운용하는 국가 중 하나로 독일이 꼽힌다. 독일은 혐오 관련 선동 행위를 형법으로 처벌하고 있다. 당초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제정됐지만 현재는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증오심을 선동하거나 폭력적 행동을 조장할 경우 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지난해 1월부터는 인터넷에서의 혐오 표현을 규제하기 위해 ‘SNS에서의 법 집행 개선법’이 시행됐다.
 
최익재·김홍준 기자, 김나윤 인턴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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