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훈범의 문명기행] 후쿠오카에 웬 가야산? 열도 곳곳엔 5세기 가야인 흔적

중앙선데이 2019.02.16 00:20 623호 22면 지면보기
이훈범의 문명기행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김해 금관가야의 철기 유물들. 투구와 갑옷, 말투구 등이 보인다. 말투구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으로 챙과 얼굴, 볼 가리개가 완전히 갖춰진 실전용이다. [사진 복천박물관]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김해 금관가야의 철기 유물들. 투구와 갑옷, 말투구 등이 보인다. 말투구는 국내에서 처음 발굴된 것으로 챙과 얼굴, 볼 가리개가 완전히 갖춰진 실전용이다. [사진 복천박물관]

“햇볕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나림(那林) 이병주의 명언으로 지난번 기사를 마무리했는데, 사실은 하나가 더 있다. 햇볕도 안 들고 달빛도 비켜가는 곳에 습기가 차면 음산한 이데올로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역사의 자의적 해석, 나아가 의도적인 역사 왜곡이 그렇게 생겨난다.

오사카 ‘사천왕사 왔소’ 연례 축제
가야 복장 사람들이 행렬 맨 앞에

가야의 철기가 맨 처음 아니지만
투구·갑옷 등 철제품 조형미 탁월
역사는 역사, 이념 변질돼선 안 돼

 
역사를 이데올로기로 변질시키는 누기(漏氣)는 주로 맹목적 애국심이다. 일본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대표적이다. 오늘날에는 일본 학계에서조차 생명력을 잃은 터, 굳이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것은 그처럼 이데올로기화된 역사는 정치권력에 악용돼 인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에도(江戶) 시대(1603∼1867) 때부터 일본 국학자들이 주장하던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에 의해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껏 상상하되 그것만 옳다 믿진 않아
 
어찌 보면 과거 국내학자들이 ‘임나’란 말 자체를 꺼내는 걸 금기시하고 일본학자들의 주장에 체계적으로 반론을 펴지 않았던 것 또한 역사를 이데올로기와 구분하지 못한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란 과거의 일이기에 후대의 역사 해석은 상상력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증거 사료가 적을수록 더욱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상상과 주장은 다르다. 내 상상이 명백한 증거로 입증되기 전까지는 그저 가설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때는 다른 상상, 즉 다른 가설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상상만 옳고 남의 상상은 틀리다는 주장은 억지요 독선에 불과한 것이다. 명백한 사료가 있어도 그 해석이 다를 수 있을진대, 사료가 부족한 부분에서는 두 말이 필요 없다.
 
일천한 지식과 게으른 발걸음으로 가야사를 더듬으면서 절실히 느낀 게 그것이었다. 마음껏 상상하되 그것만 옳다고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혹시 간과되거나 누락되는 것이 없는지 잘 살펴야 하지만, 행여 부풀려지거나 미화되지는 않는지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가야를 ‘철의 왕국’이라고 하지만 인류가 철을 만진 건 가야인들보다 거의 1500년이나 앞선 일이다. 기원전 1200년 즈음 이미 세계 여러 지역에서 철기를 사용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철기 문명을 이룩한 히타이트인들이 철제 무기를 만든 때는 기원전 1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들이 만든 철기는 철광석을 녹여 만든 게 아니라, 쇠와 불순물이 섞인 철광석 덩어리를 두드려 만든 단철(鍛鐵)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독보적인 야금 기술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히타이트인들은 철기 제국으로 성장한다. 4대 고대 문명 중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것도 히타이트의 철기 제조 기술 덕분이었다.
 
한반도에 철기가 들어온 것도 기원전 300년 무렵이다. 중국 전국시대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역에서 출토되는 점으로 미뤄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이어 기원전 108년 낙랑군의 설치와 더불어 한반도에 철기가 급속도로 전파됐다는 게 정설이다. 따라서 가야의 철기는 당시의 한반도 사람들에게 결코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가야의 철기를 폄하할 건 아니지만, 또한 독보적인 철기로 미화할 것도 아닌 것이다. (가야의 철제 투구와 말 갑옷, 깃대, 환두대도 등 철제품의 조형미는 부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백성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난 기사에서 가야 유민에서 신라의 지배세력으로 성장한 김유신 가문을 언급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신라는 가야를 정복한 뒤 오늘날 충주지역에 지방도시 중원경(中原京)을 만들어 가야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진흥왕의 총애를 받은 가야금 명인 우륵(于勒)조차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가 아닌 중원경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다. 가야 귀족 출신으로 신라 최초의 유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강수(强首) 역시 그렇다. 그는 당나라 장수 설인귀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친서를 써 문무왕의 칭찬을 받았다.
 
“강수가 문장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 서한으로 중국과 고구려, 백제에 뜻을 전한 바, 능히 우호를 맺는 공을 이뤘다. 선왕이 당나라에 병력을 청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 덕분이지만 또한 문장의 도움도 있었으니, 어찌 강수의 공을 소홀히 하랴.” (『삼국사기』 <열전 제 6>)
 
그럼에도 강수가 신라 17관등 중 8등에 해당하는 사찬(沙飡) 벼슬에 머문 것은 스스로 고백하듯 “중원경 사량(沙梁) 사람”인 까닭이 아닐 수 없다.
 
그들보다 신분이 낮은 수많은 가야 백성들은 가야 멸망 후 노비나 그와 비슷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운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한다. 가장 가까운 곳이 일본이다. 가야 때부터 교류가 많았던 만큼 이질감도 덜 했을 것이다. 국가나 국민, 국경의 개념이 오늘날처럼 확고하지 않았던 시기인 만큼 일본의 거부감도 심하지 않았다.
 
 
당시 왜인들이 만난 첫 외국인은 가야인
 
2017년 오사카에서 열린 사천왕사 왔소 축제.

2017년 오사카에서 열린 사천왕사 왔소 축제.

오늘날 일본 오사카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는 매년 11월 ‘왔소 축제’가 열린다. 가야와 백제, 고구려, 신라, 조선의 사절단 복식을 한 가장행렬 참가자들을 향해 길가에 모인 인파들이 “왓쇼이!”를 외친다. 이는 우리말 ‘왔소?’에서 유래한 것이다. 불교와 한자, 도예, 건축 등 선진 문명과 문화를 전한 한반도 도래인들에 대한 과거의 환영식을 재현하는 것이다. 1000여 명의 가장행렬에서 가야 복장을 한 사람들이 선두에 선다고 한다. 그만큼 수가 많았다는 뜻이다.
 
가야 유민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스에키.

가야 유민들에 의해 일본에 전해진 스에키.

실제로 일본에서 도질 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출현하는 시기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의 축조가 중단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전 시기의 일본 토기는 좀 더 무른 토기인 하지키(土師器)가 대부분이다. 스에키는 철분 함량이 많아 짙은 회색 빛이 나고 단단해 왕실과 귀족들이 애용하던 토기다. 5세기 즈음 일본으로 건너간 김해 가락국의 유민들이 만든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어 사전을 보면 ‘가라(から)’라는 말이 있는데, ‘일본 문화를 모르는 외국사람, 외국문화’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일본 열도에서 왜인들이 만난 최초의 외국인이 가라인, 즉 가야인들이었던 것이다. 이 ‘가라’에는 또한 ‘당(唐)’이란 뜻도 있다. ‘가라’가 처음엔 외국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다, 일본이 당나라와 직접 교역을 시작하면서 외국의 대명사가 당이 됐고, 원래 있던 발음 ‘가라’를 당 자에 붙였다는 해석이 그럴듯해 보인다.
 
일본에 건너간 가야인들의 기술이 당시 일본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것이었던 만큼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작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이주 가야인들은 대부분 일본 지배층에 편입된다.  
 
가야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 지명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가설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후쿠오카현의 가야산(可也山), 가라(韓良), 다타라천(多多羅川), 다타라촌(多多羅村), 사가현의 가라쓰(唐津), 야마구치현의 다라(多羅), 다타라산(多多良山), 나라현 아스카의 가야나루미 신사(賀夜奈流美神社), 지바현의 다타라(太太良) 등이 그런 곳이다. 이러한 지명들은 “가야인들이 일본 열도의 입구인 규슈 북부로 건너가 야마토 지역까지 이동하는 과정에서 각지에 정착하면서 남긴 흔적”이라는 게 조원영 합천박물관장의 설명이다.
 
일본 천황계가 백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설 역시 일본사회에 대한 가야 유민들의 이 같은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고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래서 어떻다는 건가. 우리가 일본 왕실에 대해 친권을 행사할 것도 아니잖는가. 일본은 일본이고 역사는 그저 역사일 뿐이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