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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판사들은 정치를 했다

중앙일보 2019.02.15 00:19 종합 35면 지면보기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판사들이 정치를 했구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재판에 넘기는 검찰의 공소장을 읽은 뒤 내린 결론이다. 296쪽에 걸친 문건은 강제징용 손해배상,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국정원 대선 개입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상세히 나열했다. 검찰의 표적 수사라는 의심과 함께 전부 엉터리는 아닐 거라는 전제를 깔고 훑어봤다. 사법부와 정치권력의 묵시적 결탁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양승태 사법부’가 의도했든, 아니면 박근혜 정권의 압박에 떠밀려서든 정치적 딜(deal)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사법부의 서글픈 자화상을 목격했다. 그 이면엔 ‘판사의 정치화’라는 현상이 관통하고 있었다.
 

재판 개입 의혹 사고있는 양승태
권력과의 유착으로 몰락 자초해
‘김명수 사법부’의 주류 세력들도
특정 정치 성향으로 경도될 우려
판사의 정치화 고착될까 두려워

양승태 운명은 얄궂다. 그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불렸다. 공직을 떠나면 직접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떠나겠다고 얘기한 적도 있다. 법원산악회장을 지낸 등산 마니아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됐지만 ‘크게 흠잡을 데 없는 대법관’이란 평가를 받았다. 2011년 2월 대법관을 마치면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대법원장을 하겠느냐.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라고 했다. 6개월 뒤 미국 요세미티 공원을 트레킹 하던 중 이명박 정부로부터 대법원장 내정 통보를 받았다. 한 차례 고사할 정도로 곧았다. 이후 2017년 9월 퇴임까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양승태는 치욕의 나락으로 추락했나. 헌정사상 최초로 법정에 서는 사법부 수장의 멍에를 안게 된 실마리를 공소장에서 추론했다.
 
‘정치의 사법화’라는 흐름 속에서 몰락의 원인이 발견된다. 권력이 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갈등적 사건들을 사법에 떠넘기는 게 국제적 추세다. 강제징용의 경우가 그랬다. 공소장에는 “배상 판결 시 외교적 파장”이라는 표현과 함께 청와대가 감당하기 벅차니 대법원이 재판을 통해 해결하라는 압박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결국 “2013년 12월과 2014년 11월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에서 비서실장 주재로 외교부장관, 법무부장관, 법원행정처장 등이 두 차례 대책회의를 가졌다.” 정부 관료와 재판을 ‘협의’했다는 사실은 재판의 독립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양승태는 청와대를 향해 감히 ‘No’라고 거절하지 못했다.
 
고대훈칼럼

고대훈칼럼

‘사법의 정치화’가 동시에 진행됐다. 사법부는 조직의 이해를 관철하려고 자발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 양승태의 역점 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법원행정처는 2015년 7월 ‘BH(청와대) 설득 전략’이라는 문건을 생산했다. 그리고 “대통령과 가깝고 비중 있는 인사들에 대한 개인별 맞춤형 접촉”을 추진했다.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 양승태는 사법부의 일탈과 유착을 방조했다.
 
정치에 물든 법원과 판사들 역시 정치와 사법의 경계를 망각했다. 전교조 사건에선 “(청와대와 사법부) 양측에 윈-윈 결과를 가져오도록 하고, 그 반대급부로 청와대로부터 적극적인 협조를 얻는다”고 판단했다. 상고법원 입법 추진, 대법관 임명 제청, 법관의 재외공관 파견, 법관 증원을 청와대에 내밀었다. 재판이 거래 수단으로 변질됐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권력을 견제하라는 ‘법의 지배(rule of law)’는 왜곡됐다. 그들은 그 지점에서 판사가 아니라 정치인들이었다.
 
양승태의 비극은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 남용이란 법률적 문제에 있지 않다. 유·무죄를 떠나 사법을 정치와 이념에 오염시킨 도덕적 죄가 더 크다. 그게 양승태 사태의 실체다.
 
언제부턴가 사법부가 권력투쟁의 장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정치 게임의 승자가 독식하는 전리품처럼 권력의 종속물이 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김명수 대법원장은 물론 대법관, 헌법재판관, 청와대까지 비슷한 성향의 판사들이 요직을 꿰찼다. “재판은 곧 정치” “재판으로 세상을 바꾸자”라고 외치는 판사들이 점령했다. 정치적으로 경도된 판사가 자신의 성향에 따라 판결하면 사법의 정치화는 더 악성으로 곪아간다는 사실을 다들 아는데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공소장에 나온 ‘물의 야기 법관’이란 표현이 눈길을 끈다. 양승태 체제에 반기를 든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려고 붙인 딱지다. 물의 야기 법관은 주류로 떠올랐고, ‘한때 잘 나갔던 판사’는 적폐 판사로 급반전하는 살벌한 굿판이 당연시된다면 제대로 된 조직일 리 없다. 양승태 체제에서 저항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00명의 판사가 부역죄의 살생부에 올라있다. 김경수 경남지사를 법정구속한 성창호 부장판사가 “양승태 적폐 사단의 조직적 저항”이라고 매도되지만 법원 주력 세력은 모른 척하는 게 ‘김명수 사법부’다. 사법부가 정치권력과 이념에서 독립하지 않는 한 사법 적폐 청산을 백날 떠들어봐야 소음에 불과하다. 판사의 정치화가 불치병으로 굳어질까 두렵다.
 
고대훈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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