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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직격 인터뷰] “도이머이 성공, 열쇠는 미국이 쥐고 있었다”

중앙일보 2019.02.15 00:02 종합 30면 지면보기
베트남 개혁·개방 전문가 이한우 서강대 교수
서강대 동아연구소에서 만난 이한우 교수. 그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거둔 성과와 한계를 북한이 현명하게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정동 기자]

서강대 동아연구소에서 만난 이한우 교수. 그는 ’베트남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거둔 성과와 한계를 북한이 현명하게 참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정동 기자]

김정은은 과연 베트남을 북한의 경제 개혁·개방 모델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장소가 베트남으로 정해지자 ‘도이머이’(쇄신)로 대표되는 베트남 개혁 노선에 관심이 높아졌다.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이미 지난해 7월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해 베트남의 기적과 같은 경제 번영을 이루라”고 촉구했다. 북한으로서도 너무 덩치 차이가 나는 중국보다는 상대적으로 간극이 좁은 베트남 모델을 더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1986년 12월 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 공식 채택된 ‘도이머이’는 ‘탈사회주의적 요소 도입과 문호 개방을 통한 성장 정책’으로 요약된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 유지는 벗어날 수 없는 기본 틀이다. 그러나 이런 압축적 설명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역동성이 있다. 이를 간과하면 베트남 모델의 북한 적용 가능성에 대한 논의도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농업부터 손댄 베트남 개혁정책
대미 관계 개선으로 본격 물꼬 터
눈부신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 경쟁력은 여전히 미흡

북, 외국 자본 유치 급선무지만
베트남 모델 한계도 의식해야
개혁에도 체제 불안 없으려면
인민 삶 개선해 정당성 얻어야

 
투자 관점에서 베트남 경제를 연구하는 국내 전문가들은 많지만, 베트남의 정치 경제 변혁 자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본 학자는 많지 않다. 이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전문가인 서강대 동아연구소 이한우 교수를 12일 연구실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베트남 모델이 북한에 적용 가능한지를 따지기 위해서는 베트남 개혁개방의 배경과 진행 과정, 성과와 한계 등 전체적인 그림부터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이머이 선언 당시 베트남 경제는 어느 정도 어려웠나.
“1975년 베트남 지도자들은 통일을 이룬 뒤 국가 건설에 대한 굉장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자신감은 경제가 난관에 부딪히면서 사라졌다. 통일 이듬해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장 목표는 연간 13~14%였다. 하지만 성과는 0.4%에 그쳤다. 북부 공업이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남부의 공장은 외국 자본의 철수로 가동률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가장 심각한 부문은 농업이었다. 2모작·3모작이 가능한 농업 국가임에도 식량을 수입해야 할 지경이었다.”
 
역시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 때문인가.
“당시 농민들은 수입의 3분의 2를 집단농장 밖에서 얻고 있었다. 집단농장의 비효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농업생산이 저조하자 70년대 말 북부에서는 지방 간부와 농민 간에 탈법적인 ‘생산물 계약제’가 성행했다. 지방 간부가 농민들에게 토지를 단기간 배분한 뒤, 농민이 계약량만 집단농장에 내면 나머지는 갖도록 하는 식이었다. 남부에서는 집단농장화에 대한 농민의 반발이 강했다. 사영 농업을 지키고자 하는 농민의 욕구 때문에 정부의 농산물 수매가 곤란해졌고, 도시에 대한 식량 공급마저 어려워졌다. 상황을 개선하고자 80년대 전반 ‘신경제정책’이라는 부분적 개혁 정책을 폈으나 반짝 효과에 그치고 말았다. 부분적 개혁 과정에서 민간에 축적된 부를 공식 부문으로 끌어내고자 85년 화폐개혁을 단행했으나 600~700%대의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결국 중앙집중식 경제 관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전면적 쇄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국제정치적 상황도 작용했을 것 같다.
“1978년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자극이 됐다. 베트남은 자신들 개혁개방 모델의 독자성을 강조하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방향이다. 대개 7~8년 차이로 비슷한 개혁 정책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탈사회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베트남을 사회주의화해야 한다는 모순 때문에 진행이 좀 늦어졌다. 80년대 중반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도 개혁 정책 도입에 순기능으로 작용했다. 한국·대만·싱가포르·홍콩 등 이른바 동아시아 4룡의 눈부신 경제발전도 자극제가 됐다. 당시 베트남에서는 한국 경제학자들의 논문을 모아 ‘남조선 경제’를 내부 자료로 발간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컸다.”
 
어디서부터 손을 댔는가.
“흔히 베트남 개혁개방의 성공 요인으로 외국인 투자를 들지만, 내부적 개혁에 더 주목해야 한다. 농업에서는 사실상 탈사회주의화가 일어났다. 농지를 가구 구성원 숫자 기준으로 배분해 장기간의 토지사용권(논은 20년, 산림은 50년)을 줬다. 토지소유권은 국가가 갖지만, 농민이 상속·전매·저당 권리를 갖게 했다. ‘실질적 사유화’다. 이런 조치가 성과를 거두면서 식량 공급 안정을 찾았고, 89년 쌀 수출국으로까지 변신했다. 개혁 출발점을 먹고 사는 문제 해결로 삼은 것이다. 기업부문의 개혁은 90년대 본격 착수했다. 1만2000개에 이르는 국유기업을 재등록 과정을 거쳐 절반으로 줄였다. 이후 기업 개혁은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만들어 지분 일부를 국가가 소유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해외자본 유치를 통한 공업화 전략이다.
“도이머이를 선언하고 나서 금방 외국 자금이 몰려들지는 않았다. 1988년 새 투자법을 시행하며 서서히 증가했으나, 역시 미국이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93년 국제금융기구(IMF)의 대 베트남 융자 재개를 미국이 허용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자금이 몰려 왔다. 그때까지 베트남은 78년 캄보디아 침공 때문에 경제 제재를 받고 있었다. 89년 캄보디아에서 베트남군이 철수한 뒤에야 상황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경제 제재 해제(94년), 대미 수교(95년)가 잇달아 이뤄지면서 해외 자본 유치는 본격적 흐름을 타게 됐다.”
 
모든 개혁에는 진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보수의 반발, 국민의 민주화 요구 등이 크게 문제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진통이 없었을 리 있겠나. 하지만 노선 갈등이나 권력 투쟁이 당 내부에서 걸러져 표출됐다는 것이 특징이다. 프랑스·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며 ‘혁명 노선’으로 일관하던 공산당 지도부에 80년대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실용적 개혁적 사고가 싹텄다. 특히 1986년 6차 당 대회 직전 총서기에 오른 쯔엉찐의 역할이 주목할만하다. 그는 좌익 편향에 마오쩌둥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심각한 경제 난국에서 생각을 바꿔 개혁 추진론자가 됐다. 보수주의자였던 전임자 레주언이 사망하자 총서기를 이어받으며 시장 경제 도입의 바탕을 마련했다. 6차 당 대회에서 쯔엉찐·팜반동·레득토 등 ‘트로이카’로 불리던 당 원로들이 동반 퇴진하고, 새 총서기이자 개혁파인 응우옌반린에게 입지를 내준 것도 큰 힘이 됐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군대나 경찰의 장악력이 워낙 강해 적어도 국내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개혁의 성과는 눈부시다. 하지만 문제와 과제도 꽤 있을 것 같다.
“도이머이 시작 당시 100달러 이하였던 1인당 GDP는 작년 2587달러가 됐다. 구매력평가지수(PPP)로는 8000달러에 가깝다. 대외 교역은 150배가량 늘었다. 빈곤율도 60% 선에서 10% 이하로 줄었다. 긍정적 성과들은 더 있지만,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양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 투자의 활력이 국내 경제로 연결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베트남 수출의 70%는 외국인 투자기업이 담당한다. 베트남에 진출해있는 삼성이 단독으로 25%를 차지할 정도다. 그러나 이와 연결된 부품·소재산업 등 현지 협력업체의 경쟁력은 아직 기대 이하다. 국가의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기조 위에서 국내 기업을 키워온 한국의 경제개발 모델과는 차이가 있다.”
 
결국 관심은 베트남의 발전 모델이 북한에 적용될 수 있을까다.
“인민이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베트남이 농업 부문부터 먼저 손을 댄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생산과 분배의 단위를 집단이 아닌 개별 농가로 삼으면서 생산성이 뛰어올랐다. 북한도 현재 ‘분조 도급제’를 ‘농가 경영제’로 전환하는 것이 급선무다.”
 
북한도 최근 ‘포전담당책임제’라는 이름으로 농업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은 ‘실질적 사영농업’인 농가 경영제로 가야 한다. 외국인 투자를 강조하지만, 농업 생산 안정화가 선결 과제다. 베트남의 농업 개혁 성공에는 2모작·3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좋은 기후 조건도 작용했다. 북한이 불리한 기후 조건을 극복하고 농업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협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농약과 씨앗 등 영농 자재 보급, 관개시설 정비 같은 농가 지원 활동으로 농업 생산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미국과의 협상이 잘 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 외국 자본이 몰릴까.
“북한이 스스로 외국인 투자가 몰려올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 역시 미국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베트남처럼 미국의 제재가 완전히 풀려야 돈이 몰린다. 이 경우에도 미국은 투자자 역할보다는 시장으로서 역할이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베트남의 최대 수출 시장이지만, 외국인 투자에서는 7위에 그치고 있다.”
 
북한 공업의 경쟁력이 관건일 텐데.
“외국인 자본 유치는 중요하고,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베트남처럼 국내 공업의 발전 없이 외국인 투자 중심의 경제 성장에만 기대면, 견실한 경제 체제 건설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대형 외국인 투자 기업과 협력할 수 있는 중소기업 육성에 노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선 대북 투자의 중심이 될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북한의 개혁 개방 과정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발생할 가능성은 없을까.
“북한 지도부가 인민들에게 어떤 성과를 보여주느냐에 달렸다. 베트남의 개혁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결국 인민의 살림살이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업적 정당성’이다. 관료들의 부패와 전횡, 지속되는 1당 통치 체제에 대한 국민의 염증을 극복한 힘도 경제적 성과다. 여기에 최근 반부패운동이 더해졌다. 일단 개혁 개방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뒤에는 이런 업적 정당성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한우는…
1959년생. 베트남의 개혁 과정을 연구하는 국내 몇 안 되는 전문가다. 서강대에서 베트남 개혁 정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트남 경제개혁의 정치경제』, 『베트남 한류를 보는 한국과 베트남의 시각』 등의 저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로 있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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