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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 실수에 발끈한 나, 마음 속 그림자 탓일까

중앙일보 2019.02.14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28) 
국립한글박물관 '소리x글자:한글 디자인' 전시. [중앙포토]

국립한글박물관 '소리x글자:한글 디자인' 전시. [중앙포토]

 
모음과 자음
 
누가 무녀리의 맏이가 될지
지하철의 빈 분홍색이 좌불안석이다
앞장은 서도
혼자서는 제소리조차 낼 수 없는 자음들
뒤에서 헛웃음을 짓는 모음들
 
궁굴린 자모가 물의 파문인 양 포옹할 때
요령 소리와 신음하는 시가 벙글었었다
 
침묵이 도금인 세상의 윈도
한 줄에 꿴 명태처럼 가슴 뚫린 채
인연과 실연 사이를 왕복하며 파동 친다
자음과 모음이 눈 흘기고
달뜬 놀이 지고 나면
걸쭉한 육자배기와 판소리는커녕
소녀시대와 방탄소년단은
찬란한 수화와 춤만 곁들일 것이다
 
스크린 도어 위에 끄적인
삼신할머니 젊은 날의 자모음만
밤꽃과 나비처럼 날아
알 듯 모를 듯 응응거리며
색동저고리 옷고름을
비릿하게 풀었을 것이다
 
곧 움틀 우주를 가지런히 품은
발이 예쁜 그녀는 눈길을 두드려도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해설]
혼잡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예측 가능한 교통수단이 지하철이다. 저녁에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거나 주말에 결혼식에라도 시간 맞추어 가려면 지하철이 정답이다. 다행히 서울의 지하철은 안전하고 깨끗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짬이 나면 스크린 도어에 적혀있는 시를 읽는다. 대개 짤막하고 평이해서 부담이 적다. 가끔 스크린 도어용 시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래도 효용가치는 크다. 이러나저러나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져주지 않는가. 공감하는 마음이 생기고 호기심과 ‘아하’하는 느낌을 받으면 족하다. 특별히 마음에 닿는 시는 사진을 찍어 두고 전철 안에서 다시 읽어본다.
 
눈총받는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
언제부터인지 객실 안에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됐다. 그런데 그 배려석이 많은 사람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보다. [중앙포토]

언제부터인지 객실 안에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됐다. 그런데 그 배려석이 많은 사람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보다. [중앙포토]

 
언제부터인지 객실 안에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이 마련됐다. 그런데 그 배려석이 많은 사람의 심정을 복잡하게 만드는가 보다. 혼잡한 열차에서 꼭 자리를 비워놔야 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다 보니 분홍색 좌석은 여러 사람의 눈총을 받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빈자리가 많을 때는 굳이 찾아서 앉지 않는다. 만석이 되고 서 있는 사람이 생겨 시선이 차단될 즈음에는 누군가 염치 불고하고 과감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럴 때 지켜보는 마음이 꺼림칙하다. 난 슬며시 눈길을 피하고 만다.
 
특히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 속에서 뭉클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건 나만 그럴까. 또 중년의 여성이 조금은 뻔뻔스럽게 앉아 있어도 고개를 돌리게 된다. 어찌 자기 생각만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편하고 아무렇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지켜보는 사람의 불편한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도 필요하다. 사실 임산부 배려석에 꼭 맞게 앉은 경우를 본 적이 드물다.
 
얼마 전 젊은 여성이 지하철을 타고 내 앞에서 분홍색 자리에 앉는 걸 보았다. 호기심인지 그의 배에 눈길이 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앉은 사람들 눈초리가 일시에 그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남을 곁눈질한다는 게 겸연쩍어 나는 눈길을 내리깔고 말았다. 그러다가 가지런히 모은 손과 발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다. 가슴 속에 소중한 보물을 품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읽혔다.
 
양발과 무릎을 조신하게 닫고 두 손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아 무엇 하나 허투루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는 경건함이 배어 나왔다. 어쩌면 갓 임신 소식을 듣고 태교를 어찌하면 좋을지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사람은 남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 우러나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지하철 안의 풍경은 약간 삭막하다. 대개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 화면에 푹 빠져 있다. 다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듯한 광경이다. 목줄처럼 덩그러니 매달린 이어폰은 자유를 차단한 채 어디론가 끌려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심지어 서 있으면서도 손을 화면에 터치하다 보니 여기저기 주인 잃은 객실 손잡이들이 그네처럼 흔들린다. 차갑고 세찬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덕장에서 한 줌의 볕을 기다리는 명태처럼 승객들은 가슴이 뚫린 채 자신을 말리고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 침묵은 더는 금이 아니다. 그저 겉만 금으로 도금한 가짜다. 말과 글은 세상과 소통하며 자신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말과 글에 진심을 담을 때 신이 내린 영매가 흔드는 요령처럼 소리가 영롱하게 울려 퍼진다. 요즘 SNS상에서 퍼지는 말과 글은 마치 영혼을 잃은 좀비 같다. 또 왜 그렇게 남의 글을 퍼다 나르는지 모르겠다. 심할 때는 같은 글이 여기저기서 날라 온다. 훈계하고 가르치려 드는 글에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온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하다 보니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창에는 여러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심리학자 융의 분석에 따르면, 우선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배우 같은 역할이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며 부모가 되고, 모임이나 일터에서 어떤 위치에 있거나 어떤 직업을 영위한다.
 
그러니 하루에도 여러 가지 페르소나를 바꾸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페르소나를 때와 장소에 알맞게 변화시켜 가며 사는 게 여간 힘들지 않다. 유연하게 변화시킬 줄 모르면 반드시 남에게 폐를 끼치고 만다. 누구나 공공장소에서는 특별한 나를 주장할 게 아니라 갑남을녀의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
 
'그림자 콤플렉스'로 부르는 심리상태는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상처로 작용해 발끈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중앙포토]

'그림자 콤플렉스'로 부르는 심리상태는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상처로 작용해 발끈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중앙포토]

 
‘그림자와 콤플렉스’로 부르는 심리상태는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상처로 작용해 발끈하는 모습을 일컫는다. 흔히 상대방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하지 못하고 싸움을 걸듯 화를 내고 이기려 드는 것은 자신에게 어두운 그림자나 콤플렉스가 숨어 있다는 표시다.
 
자칫 함부로 짜증을 부리고 화를 내었다가 곧 부끄러워 자신이 미워지고 죄책감에 시달려 고민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특히 콤플렉스는 남과 비교하면서 생긴 과도한 열등감일 때가 많다.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속담이 바로 그림자와 콤플렉스가 없는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또 하나 잘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마, 아니무스’이다. 성숙한 남자와 여자는 각자 안에 반대 성향의 성품이 있다. 남성에게는 여성적인 면이 숨어 있고, 여성에게는 남성적인 면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일부러 이를 부끄럽게 여겨 감추고 아닌 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과장되게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면만 드러내 보이고, 타인에게는 손가락질까지 하게 된다. 이유 없이 상대방의 성을 무시하려 들고 오해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결혼을 통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완성
인간의 언어는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다. 특히 한글은 초성, 중성, 종성의 구분이 확실하다. 초성엔 자음이 오는데 모음의 도움이 없으면 결코 발음할 수 없다. 중성인 모음은 혼잣소리를 낼 수는 있으나 대개 헛웃음 소리 비슷하다. 성숙한 아니마와 아니무스 관계는 바로 발성에서도 증명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사람은 남녀 간의 사귐이나 결혼을 통해 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면에 숨어 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완성하는 길이다. 어쩌면 시와 삼신할머니는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한 성숙한 인간이 되기까지 지켜봐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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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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