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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의 공존의 문명] 성 소피아 성당과 ‘이스탄불 정신’

중앙일보 2019.02.14 00:35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다양한 세상 문명을 만나기 위해 어디서 어떻게 해외여행을 시작할 것인지를 묻는 이들에게 나는 주저 없이 이스탄불을 추천한다. 동양과 서양에 걸친 이 도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갈등 대신 공존하는 무대일 뿐만 아니라, 박제된 역사가 아닌 수천 년의 삶이 녹아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영국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인류 문명의 옥외 박물관이라 평했듯이 다름과 섞임이 당연한 도시다. 오랫동안 이스탄불에 살았으면서도 그동안 150번 이상 시간만 나면 이스탄불로 달려가는 이유다.

 
이 도시는 그리스의 비잔티움에서 출발해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로 무려 2200년간 세상의 중심이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서 유럽 중심의 역사에서 저평가되었지만,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 600년(1299~1923)이 인류 근대사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오스만 제국 통치 철학의 핵심은 종교적 공존, 종족적 공생,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이었다. 그 정신은 ‘밀레트(millet)’불리는 소수 공동체에 잘 구현되었다. 밀레트 내에서는 총대주교나 유대교 랍비를 중심으로 고유한 관습과 율법의 자치가 허용되었다. 이스탄불 구시가를 내려다보는 갈라타 탑이 서 있는 일대는 전통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지금도 소수의 유대인들이 이곳의 시나고그(유대인 회당)를 중심으로 5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 라마단(단식) 달이 되면 터키사람들은 단식을 시작한다. 한 달 동안이나 해가 있는 동안 일체의 음식을 금한다. 물조차 마시지 않는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권력자나 서민 모두가 똑같은 조건에서 배고픔과 절제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공동체의 단합과 나눔을 실천하자는 이슬람 종교의 5대 기본 계율 중의 하나다.
 
화해와 공생이라는 이스탄불 정신을 상징하는 성 소피아 성당. 6세기 비잔틴 건축의 대표작으로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로 번갈아 사용됐다. [사진 이희수]

화해와 공생이라는 이스탄불 정신을 상징하는 성 소피아 성당. 6세기 비잔틴 건축의 대표작으로 기독교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로 번갈아 사용됐다. [사진 이희수]

그런데 내가 만난 갈라타 지구의 많은 유대인들은 낮 동안 가게 문을 닫고 함께 단식한다. 인터뷰를 하면서 질문을 던져보았다. 유대교 안식일과 율법이 따로 있는데, 굳이 이슬람의 단식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처음에 그들은 나의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재차 같은 질문에 비로소 그들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동시키는 대답을 준다. “내 고객의 99%가 무슬림이고, 그들이 공동체의 선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고통스럽게 금식하고 있는데, 종교가 다르다고 내가 배불리 먹으며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기본 상도덕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축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런 정신으로 유대인들은 술탄 직 말고는 모든 요직에 오를 수 있었고, 세 명의 재상을 배출했다.
 
지금도 터키 10대 대기업 중 3~4개가 유대계 가문이 차지한다. 터키 최대 일간지인 휴리에트(자유)는 유대계, 두 번째 일간지 사바흐(아침) 신문은 그리스계 사업가에 의해 창간되었다. 대다수 터키 국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 기업이 좋은 상품을 내놓고 국가 경제에 기여하고, 가장 읽을거리가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1830년 독립을 쟁취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은 이스탄불에 그대로 남아있다. 서로 다른 가치와 생각을 받아들여 창의적으로 통합하는 나라는 번성하고 자기 것만 고집하고 다른 것에 배타적인 나라는 발전하기 어렵다는 예외 없는 준엄한 역사적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그것은 ‘이스탄불 정신’이다.
 
이런 화해와 공생의 상징이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이다.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 6세기 비잔틴 건축의 압권이다. 916년간은 교회로, 481년간은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높이가 56m나 되는 중앙 돔에 수많은 보조 돔을 사용하여 기둥 없는 넓은 중앙 공간을 두는 비잔틴 양식은 훗날 모스크를 비롯한 이슬람 건축 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내에는 코란과 기독교 성화가 나란히 자리하면서 서로 다른 종교와 가치가 공존할 때만 호흡할 수 있는 온화한 영성이 그득하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주 제단은 로마로 향해 있지만, 이슬람의 기도처인 미흐랍은 정확히 메카를 향해 있다. 신의 방향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신의 세상은 같은 지향점인지도 모른다.
 
성 소피아 성당은 1204년 제4차 기독교 십자군에 침략당해 치유될 수 없는 수난을 경험하였다. 애초부터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부유한 콘스탄티노플의 재화를 노렸던 십자군 원정대는 성 소피아 성당의 성화와 성물을 약탈했고, 저항하는 성직자들을 교회 안에서 무자비하게 도륙했다. 수녀들과 여인들은 성스러운 제단 앞에서 겁탈당했다. 이 전쟁에 참전한 비잔틴 역사가들조차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이토록 야만적인 방법으로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한 도시에서 얻은 적은 없었다’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1054년 동서 교회가 분리된 이후 당시 서유럽인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소탕되어야 할 이교도의 소굴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정복되어 이슬람의 심장부가 되었다. 제국의 멸망을 앞두고 로마 교황이 가톨릭으로의 통합을 전제조건으로 십자군 파병을 제의했을 때,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단호히 이를 거부했다. ‘터번을 둘러쓴 이교도의 지배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비굴하게 로마 교황청의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황제는 시민들과 함께 품격있는 멸망의 길을 택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악몽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어떤 종교의식도 허락되지 않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그리스인들에게 성 소피아 성당은 언젠가는 꼭 되찾아야 할 신앙의 중심이고 역사의 복원이지만, 터키인들에게는 정복의 영광이고 지켜야 할 제국 후예의 자존심이다. 모든 역사는 이렇게 서로 다른 이해관계의 교집합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공존과 화해의 상징으로 이스탄불은 꼭 기억되어야 할 인류의 가치이고 유산이다.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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