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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대통령의 독서정치②

중앙일보 2019.02.14 00:2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은 책을 ‘구인’의 수단으로 즐겨 쓰는 편인데, 결과는 신통치 않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게 그중 하나일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면 ‘서생적 문제의식’만 있지 ‘상인의 현실 감각’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홍장표(전 청와대 경제수석)·장하성(전 청와대 정책실장)·김현철(전 청와대 경제보좌관) 등 소득주도성장 3인방이다. 대통령이 이들의 책이나 논문을 읽고 발탁했다는 ‘설계자’ 홍장표, ‘옹호자’ 장하성, ‘전도사’ 김현철 모두 청와대를 떠났다. 이유는 조금씩 달랐지만 사실상 문책 성격이 짙었다. 3인방의 퇴출로 소득주도성장의 동력도 크게 떨어졌다. 대통령의 관심도 부쩍 ‘혁신 성장’으로 옮겨가는 중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은 새 사람을 경제과학특별보좌관으로 들였다. 역시 책을 읽고 감명받아 낙점했다. 『축적의 길』의 저자 이정동 서울대 교수다. 이번엔 어떨까.
 

실패의 축적 잘됐다면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것

일단 책의 메시지는 분명하고 좋다. 거칠게 축약하면 “실패를 무한히 용인하고, 창업을 파격적으로 북돋우며 사람, 특히 고수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특보는 지난달 30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으며 “실패도 축적이다. 실패에 대한 무한한 관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대통령은 그의 말에 “(실패의 축적에 대해) 대선 때 한창 바쁜데도 책을 읽고 이런저런 자리에서 많이 써먹었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런 대통령도 실패를 축적했다. ‘독서를 통한 구인’의 실패 말이다. 실패의 축적이 제대로 됐다면 이번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책의 한 대목에 집중해줬으면 한다. 83페이지다. 요약하면 이렇다.
 
‘16~17세기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위그노라고 한다. 이들은 당시 첨단산업인 모직·견직물, 제지·시계 등의 산업에서 온갖 실패를 축적하고 있던 기술장인들이다. 1685년 루이 14세가 이들을 박해하자 프랑스를 탈출했다. 영국·독일은 이들을 적극 받아들여 산업혁명의 선두주자가 됐고, 스위스는 시계 등 정밀기계산업의 메카가 됐다. 인재 유치 전쟁의 결과가 국가의 흥망성쇠를 가른 것이다.’
 
어디 400년 전 위그노뿐이랴.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일군 힘도 사람이다. 『미래의 물리학』의 저자 미치오 카쿠는 “실리콘 밸리의 전문 인력은 50% 이상이 인도·대만 등 동양계”라며 “ ‘천재용 비자’로 불리는 H1B 비자야말로 미국의 비밀병기”라고 적었다. 탁월한 과학지식,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인재에게 주어지는 H1B 비자가 실리콘 밸리의 원동력이란 얘기다.
 
우리는 어떤가. 규제와 반기업 정서, 실패에 대한 무관용이 되레 한국 탈출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말엔 국산 자율주행차 1호 ‘스누버’가 한국 사업을 접고 미국에서 택배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져 충격을 줬다. 핀테크 업체가 룩셈부르크·홍콩·호주로 줄줄이 탈출한 것은 5년 전 일이다. 작년엔 국내 암호화폐 발행(ICO)이 막힌 블록체인 스타트업 인재들의 싱가포르행이 이어졌다. 한국형 차량 공유는 택시업계에 막혀 수년째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축적의 길』은 규제 샌드박스 기업 몇 개를 선정한다고, 책 500권을 청와대 전 직원에게 돌린다고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정동 특보는 “금융·행정·감독·교육·복지·감사 시스템 혁신을 포함, 국가 전체가 리더와 함께 ‘축적의 길’로 가야 한다”고 했다. 집권 초 대통령이 입에 자주 올렸던 재조산하(再造山河)란 바로 이럴 때 써야 할 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정답은 대통령이 책을 나눠주며 책갈피에 적었다는 글귀에 있다.
 
‘나의 실패를 우리 모두의 경험으로 만들면 나의 성공이 우리 모두의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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