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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싱가포르의 성김, 하노이의 비건

중앙일보 2019.02.13 00:14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성김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매너가 좋고 흐트러짐이 없다. 언성을 높이는 적도 없다. 노래방에서도 나긋나긋 조용히 노래를 부른다. 로스쿨 출신이라 그런지 논리적이고 신중하다.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미국의 많은 파워우먼들이 열렬한 ‘성김 팬’을 자처했던 이유인지 모른다. 하지만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마음을 사로잡진 못했다. 성김은 싱가포르 정상회담 전인 지난해 5월 27일부터 총 9번, 32시간에 걸쳐 최선희와 마주 앉았다. 당시 협상 관계자는 “논리(성김)와 변칙(최선희)의 불꽃 튀는 싸움이었다”고 말했다. 최선희는 법리적으로 따져 들다가도 “김 대사는 내가 지금 북한 내에서 몰리는 걸 원하십니까. 나를 도와줘야 합니다”라며 감정에 호소했다고 한다. 북 외무성 전통의 ‘김계관 카멜레온 수법’이었다.
 
하지만 성김도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협상이 ‘주고받기’라 하지만 비핵화 협상에서 미국과 북한이 동등한 선상에 있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국무부 정통 외교관의 명예를 걸고 후세에 두고두고 짐이 될 결정은 하지 않겠다는 오기도 있었다. ‘일단 고(Go)!’ 성향의 트럼프와는 체질적으로 달랐다.
 
그 뒤를 이어받은 비건 대표. 스타일이 성김과는 판이하다. 행동과 사고가 자유분방하다. 한국에 오면 청와대·외교부·여야 정치인·전문가 그룹을 가리지 않고 만난다. 그래서 ‘한국 팬’들이 많다. 논리보다 행동을 우선시하는 트럼프와도 케미가 맞는다. 좋게 말하면 사고가 유연하고 활동력이 왕성하다. 나쁘게 말하면 성취욕과 과시욕이 과하다. 어떤 이는 그의 열정을 높게 평가하지만, 또 한편에선 ‘업(up·흥분) 돼 있는 아마추어’라 우려한다.
 
북한의 새 카운터파트 김혁철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워싱턴 방문 당시 미국 측은 김혁철의 행동에 상당히 놀랐다고 한다. 트럼프나 폼페이오와의 만남 당시 김영철 부위원장을 제외한 다른 일행이 입도 뻥긋 않고 조용히 있을 때 48살 김혁철은 호방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수행원에 고압적으로 명령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한다. ‘존재감’ 있는 협상가란 대외적 평가와 더불어, “결국은 아무리 만나봐야 얘기가 안 통하는 ‘김영철 과’”란 평가도 나온다. 최선희에 대비해 온 비건으로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평양을 2박 3일 다녀온 비건이 “실무협상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었다”고 한 건 “합의를 보지 못했다”는 외교 용어다. “협상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 개진이었다”는 비건의 고뇌 섞인 말이 현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무리 비건이 5개월 동안 준비작업을 해 왔다지만, 정상회담을 3주 앞으로 못 박아두고 ‘바뀐 선수’(김혁철)와 다시 출발선에 선 협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3주 만에 개최도시 정하고, 요구사항 교환하고, 비핵화 구체 조치 결정하고, 상응 조치 내밀고, 알맹이 있는 합의문을 도출하는 건 신기에 가까운 일이다. 물밑대화 3년을 해도 될까 말까 할 일이다. 1차 싱가포르 때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다.
 
비건과 김혁철이 D-10인 17일부터 2차 실무협의에 들어간다고 한다. 화끈하고 완전한 북한 비핵화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면야 최선이겠지만, ‘한방’의 유혹과 욕심 때문에 두고두고 책잡히고,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사실상 인정하고 마는 어설픈 합의는 차라리 않는 게 낫다. 협상가의 최대 함정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비건의 행동력을 믿지만, 역으로 그게 더 신경 쓰인다.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 안 된 열흘’에 맡길 순 없는 노릇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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