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상처입은 판사들…온정주의 판결 사라진다

중앙일보 2019.02.13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법부
김경수 경남도지사를 지지하는 민주당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2일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서 판결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김경수 경남도지사를 지지하는 민주당원과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2일 서울 서초동 법원청사 앞에서 판결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조롱과 경멸,저주의 대상으로 추락한 사법부. 김경수 경남도지사가 지난달 법정구속된 것을 계기로 여권 인사와 진보세력의 공격이 거칠어지고 있다. 법원은 신뢰회복을 위한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되자 내부 통신망을 통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법관들은 특별한 메시지가 없다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일부 시민들의 정치적 공세가 판결 불복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판사들을 달랠 수 있는 방안은 없었다. 사법부 내에선 정치권력의 공세에 강경 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어 또 다른 ‘사법 파동’ 조짐마저 일고 있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에 대해 일선 법관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다른 조직이나 시민들보다 휠씬 더 커보였다. 2년 가까이 이어진 법원내 블랙리스트 조사와 양승태 사법부에 대한 수사로 인해 직업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에 큰 상처를 입은 분위기다. 최근 한 대학교는 입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74.1%인 반면 사법부는 69.3%로 행정부(73.6%)보다도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법관들은 전직 대법원장이 70년 사법부 사상 처음으로 직권남용 등 47개 혐의에 엮여 구속 기소된 것을 사태의 마무리가 아닌 또 다른 시작으로 여기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에서 ‘사법개혁과 적폐청산,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열렸던 집회에 대한 법원의 반응 역시 부정적이었다. 일부는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던 이날 집회를 실시간으로 시청했거나 이후 사무실에서 짬을 내 봤던 판사들이 꽤 있었다. 특히 이들은 집회 추최측이 양승태 등 47명을 적폐 판사로 지목한 뒤 대형스크린을 통해 해당 법관들의 얼굴과 ‘비위사실’을 공개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 지방 법원의 한 판사는 “집권당 대표였던 추미애 의원이 사법부를 적폐세력으로 묘사하고 김경수 판결을 대선불복으로 연결짓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이날 집회에서 참석자들은 김경수의 법정구속은 적폐판사의 정치적 보복이며 소위 말하는 촛불정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다음 선거에선 민주당이 200석 이상을 차지할 수 있도록 밀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얘기다. “특검이 제출한 증거를 보면 김경수에게 유죄 선고를 내릴 수 밖에는 없다. 그런데도 궁예의 관심법 같은 심증판결이라고 주장하며 3000명의 판사들 모두를 적폐세력으로 모는 것이야말로 사법정의의 참사”라고 말했다. 경남 MBC가 최근 리얼미터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8.9%는 김경수 구속이 타당하다고 답했고,부당하다는 의견은 29.3%였다. 또 김경수 석방에 반대하는 의견(44.5%)이 찬성(39.6%)보다 많았다.
 
일선 법관들은 어떤 대응책을 생각하고 있을까. 서울고법 등의 중진 판사들은 ‘법대로 판결’을 주장하고 있다. 한마디로 온정주의적 판결을 배제하고 엄격주의로 전환하겠다는 얘기다. 법원장을 지낸 판사는 “관련법과 양형위원회 기준에 따르면 재판장은 일정 범위내에서 형량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가능한 무거운 형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성범죄로 3년6월의 중형을 선고받은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어중간한 형량으로 법률적,정치적 논란에 휘말리는 것보다 강한 형을 선고하는 것이 법관 개인들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이었다. 집행유예 보다는 실형과 법정구속이 많아질 것이란 예상도 가능하다.
 
최근 있었던 양형위원회 회의에서도 참석자들은 엄정한 형량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특히 이 정부들어 부쩍 심해지고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 범죄가 주 과녁이었다. 양형위원회측은 “인터넷, SNS 등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모욕하는 범죄가 크게 늘어나고 있어 엄정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인터넷 등 정보통신망을 이용한 명예훼손의 경우 전파 가능성이 높아 피해가 크고 회복이 어렵다는 점에서 일반 명예훼손보다 가중 처벌할 것을 권고했다. 최대 3년9월까지 선고하고 징역형으로 엄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법원의 이같은 대응은 검찰에도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법원의 형량 선고가 높아지는데 비례해 검찰의 구형량도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법원이 형량을 높게 선고하려 드는 기류는 또 다른 고법 부장판사의 설명에서도 감지된다. “판사의 판결을 비판하는 것은 교수, 변호사, 관련 단체 등에서 늘 하는 일이지만 판사 개인에 대한 공격은 법의 지배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판사의 도덕적 권위와 판결을 공격하는 것은 민주사회 자체를 흔들수 있기 때문에 법과 양심에 따른 법체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법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정치모리배들과 야합하고 있다”는 식의 법정 밖 선동을 막을 사법부 독립을 위해선 결국 법관 개개인들이 나서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서울고법이 다른 법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인데다 이 정부들어 주홍글씨로 낙인찍힌 이른바 적폐판사가 많다는 점에서 개혁의 저항세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양승태의 사법농단에 동조한 판사들에 대한 탄핵을 놓고 법원내 의견이 대립했던 것과 달리 김경수 판결에 대해선 큰 이견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민주당이 박주민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법농단세력·적폐청산대책특별위원회를 통해 김경수 판결문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장외 여론전을 펼치지만 판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드루킹 김동원씨에 대한 130쪽 판결문과 김경수의 170쪽 판결문을 읽어본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증거가 있고 진술의 신빙성과 일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절대다수의 얘기다.
 
요즘 법관들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 “재판이 아니라 개판”이라고 주장하는 진영을 향해 항의의 메시지를 날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김 대법원장은 단 한차례 유감의 뜻만 표현했다. “역사의 반동세력”이라며 몰아치는 정파적 항의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외풍을 막아 줘야 할 김 대법원장에 대해 유감의 뜻을 분명히 표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 주말 집회에서 이 정부 지지세력들은 적폐판사들을 탄핵시켜 김경수에게 ‘장미 로드’를 깔아주자고 했다. 2016년의 촛불을 다시 켜 문재인 정부를 밀어주자고 했다. 당시 많은 판·검사 등 법조인들도 촛불을 들고 추위 속에서 버텼다. 그 촛불엔 “나만이 정의이고 옳다”는 오만과 독선을 없애고 법치에 따른 국정운영을 해달라는 염원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민주당에게 표를 몰아주자고 광화문 거리에서 고함을 쳐대는 이들의 극단적 모습이 과연 투명한 절차와 공정한 결과를 끌어낼 수 있을까. 사법부의 온정주의 배제 기류가 향후 권력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궁금하다.
 
박재현 논설위원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