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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은 전략 …대낮 일렬로 돌격, 6만 명 잃은 이 전투

중앙일보 2019.02.11 15:00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3)
1월 1일이라고 해서 새삼 각오를 다지거나 거창한 계획을 세울 나이는 지났다. 그래도 해가 바뀌었는데 심상하게 보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싶긴 했다. 그래서 설을 계기로 뭔가 변화를 꾀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마음먹은 것이 ‘벽돌 깨기’다.
 
인제 와서 무슨 태권도 고단자들이 하는 ‘격파’를 배우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도가들이 수련을 겸해 순회 비무에 나서는 ‘도장 깨기’와는 물론 먼 이야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목침으로 써도 좋을 만한 두꺼운 책, 이른바 ‘벽돌’을 야금야금 읽어볼까 하는 맘을 먹었을 따름이다.
 
『생각의 역사 Ⅱ』 피터 왓슨 지음, 들녘

『생각의 역사 Ⅱ』 피터 왓슨 지음, 들녘

 
이렇게 해서 처음 고른 ‘벽돌’이 『생각의 역사 Ⅱ』(피터 왓슨 지음, 들녘)이다. 원저의 부제가 ‘현대인의 사고를 형성한 인물과 사상(The People and Ideas that Shaped the Modern Mind)’인 이 책은 찾아보기를 포함해서 무려 1,328쪽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문화사가인 이가 썼는데 ‘불에서 프로이트까지’란 부제가 붙은 1권-1,200쪽이 넘는다-을 포함해 2권으로 구성된 대작(大作)이다.
 
오늘 우리와 가까운 역사를 우선 알고 싶어 ‘20세기 지성사’란 부제가 붙은 2권부터 도전하기로 했는데 분량이 분량이니만큼 단숨에 읽히는 책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 필요도 없다. 흥미로운 이야기가 가득하고, 서술이 평이한 데다 드물다 싶을 정도로 번역이 매끄러워 그야말로 술술 읽히는 덕분이다.
 
‘지성’이란 말에 부담을 가질 것도 아니다. 만만치 않은 깊이를 보여주긴 하지만 책 곳곳에서 실수, 단견(短見), 착각에 인간적 약점을 만나게 되어서다. 요즘의 어처구니없는 세태와 비교해 가며 ‘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에 의문이 들 정도다.
 
전체적으로는 1900년 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간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관한 서평으로 시작해서 인터넷과 카오스 이론, ‘인공생명’으로 마무리하니 분명히 20세기 인류 문명의 진보를 다루긴 하지만 그렇다. 역사를 알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것만으로도 읽어볼 만하다.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대목을 보자. 사실 이 책은 ‘지성사’를 다룬 만큼 사실 전투 서술은 지엽적이다. 한데 당시 벌어진 솜 전투를 다룬 부분은 ‘지성’과는 거리가 멀어 눈에 들어온다. 7월 31일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영국군 6만 명이 죽거나 다쳤다. 설익은 사회진화론적 사고방식에 젖은 참모본부가 저지른 ‘범죄’ 탓이었다.
 
그들은 징집병들이 저급한 종자여서 야간 공격이나 은폐 엄폐를 하는 지그재그식 돌격은 헷갈릴 것이라 여겨 솜 강 일대 21㎞에 걸친 전선에서 대낮에, 일렬로 돌격시켜 이런 참변이 벌어졌다.
 
이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 시인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 과학자, 철학자들이 스러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이긴 하다. 이 책의 미덕은 사상, 문학, 과학, 체육 등을 아우르며 20세기의 인류 ‘성취’를 다뤘다는 데 있다.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프라이어 1호기' 조종석. 이 책은 라이트 형제가 미국 정부와 기업이 자신들의 비행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1907년 영국, 프랑스 등에 발명품을 팔려 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중앙포토]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라이트 형제가 발명한 '프라이어 1호기' 조종석. 이 책은 라이트 형제가 미국 정부와 기업이 자신들의 비행기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1907년 영국, 프랑스 등에 발명품을 팔려 했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중앙포토]

 
이를테면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 ‘발명’을 다루며 미국 정부와 기업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 라이트 형제가 1907년 영국, 프랑스 등에 자기네 발명품을 팔려 했다든가, 근대 올림픽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을 처음 도입하고 첨단 기법을 동원해 ‘올림피아’라는 기록영화를 만드는 등의 나치 독일의 선전정책 덕분이었다는 뜻밖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가 하면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이 “파워 엘리트는 문화 엘리트를 필요로 한다. 문화 엘리트는 최고의 해독제로서 어떤 사회를 막론하고 정계 실세들에 대한 최고의 비판자이며, 비판은 문화를 전진시키고 정체와 부패를 막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는 사실은 생각 거리를 던져준다.
 
전쟁이나 영웅 중심의 정치사가 아니라 ‘문화’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면서도, 그 의미와 영향을 쉽게 설명하는 솜씨 덕분에 이 책만 읽어도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있게 된 건지 한눈에 들어온다.
 
만만치는 않지만 ‘격파’가 아니라 ‘독파(讀破)’하고 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한결 명료하고 깊어질 것이다. 장담한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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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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