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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다람쥐 도로’ 양산할 예타 면제, 후유증 우려 크다

중앙일보 2019.02.07 00:14 종합 29면 지면보기
권경석 전 지방자치발전위 부위원장

권경석 전 지방자치발전위 부위원장

문재인 정부가 24조1000억원 규모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대상 사업을 지난달 29일 발표했다. 시·도별로 1~2건씩 전국적으로 23건이나 된다. 그동안 예타 관문에 걸렸던 숙원사업이 해결된 해당 지역 주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탈락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찮다. 전문가와 시민단체뿐 아니라 심지어 ‘친문 진영’ 언론까지도 비판적 논조를 보인다.
 
예타 제도는 1999년 당시 김대중(DJ) 정부가 도입했다. 총 규모가 500억 원(국비 지원 300억 원 이상)을 넘는 대형 사업에 대한 재정 투입의 경제성 확보와 예산 낭비 예방을 위한 취지에서다. 예타 면제 대상은 국가재정법 38조 2항 1~10호에 규정된 사업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번에 면제된 23건 중 18건(20조 5000억 원)은 사회간접자본(SOC)사업이다. 주된 면제 근거는 지역균형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을 위해 국가 정책적으로 추진이 필요한 사업으로 특정한 제10호 규정이다. 이 규정에서 중요한 점은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면제 대상 선정 기준의 적정성(발전 정도와 형평성)과 긴급한 상황 대응이라는 시급성·특정성이 충족될 때에 한해 예타 면제가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정부의 시·도별 나눠먹기식 대규모 예타 면제 조치는 예타 원칙을 깨고 재정법 체계를 무너뜨릴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이전 정부를 ‘토목 적폐’로 몰아놓고 이제 총선을 앞두고 ‘내로남불’ 행태를 보여 모양이 사납다. 사업비 검증 부실, 부정확한 수요 예측, 지방비 부담 갈등을 비롯해 상당한 후유증을 유발할 것으로 벌써 우려된다.
 
먼저 예타 면제 원칙과 관련해 지역균형발전 측면에서 발전 정도와 형평성, 그리고 긴급한 상황대응 측면에서 시급성·특정성이 무시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전문가들이 배제된 가운데 정치권과 관료집단에 의한 시·도별 나눠먹기식 배분으로 면제 대상사업이 결정됐다. 예산 낭비 예방과 경제성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빗장마저 풀렸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는 원칙 파기이자 예타 제도의 무력화를 의미한다. 나아가 재정법 체계의 붕괴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시론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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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이명박(MB) 정부 4대강 사업(22조원)을 적폐로 몰면서 강도 높게 비판했던 이 정부의 내로남불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방을 돌면서 지역 숙원사업 예타 면제 뜻을 밝혀온 문 대통령이 총선을 1년가량 앞두고 친문 인사가 단체장을 맡은 지역에 선심성 세금을 대거 퍼붓기로 했다. 문 정부 출범 이후 약 20개월간 예타 면제 규모(61건, 53조7000억 원)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처했던 MB 정부 5년간 예타 면제 규모(88건, 60조3000억 원)에 육박한다. 20개월과 5년의 통계가 내로남불 실상을 보여준다.
 
아울러 예타 면제 사업선정 및 시행 이후 예상되는 후유증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업비 검증 부실 사례를 보자. 전남 F1 그랑프리는 당초 총사업비 7330억 원이었는데 8752억 원으로 1000억 원 이상 늘어났다. 이미 예타를 통과했던 사업 중에서도 의정부 경전철처럼 수요 예측을 뻥튀기해 결국 법원에서 파산 선고한 경우도 있다. 예타 면제 사업의 후유증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전가된다.
 
일본의 경우 1990년대 버블 경제 붕괴에 따른 경기부양 목적으로 대규모 SOC 사업을 시행했다. 90여개의 공항과 고속도로를 무더기로 건설해 후유증이 심각했다. 수요도 없는 구간에 만든 고속도로에 차 대신 다람쥐와 소만 다닌다는 ‘다람쥐 도로’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에 예타 면제된 사업(24조1000억원 규모) 중 국비 등을 뺀 지방비(약 2조원) 부담을 놓고도 지자체 간에 상당한 갈등도 예상된다. 예컨대 창원 도시철도의 경우 6400억 원 규모의 예타 통과사업이었지만 각각 20%를 떠안은 경남도와 창원시의 지방비 부담 갈등으로 사업을 반납한 사례가 있다.
 
예타 제도를 도입한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예타 대상 사업(767건)의 36.7%를 부적합 판정해 국고 141조 원을 절감했다고 한다. 예타 제도를 제대로 시행하면 예산 절감 등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정치 논리에 따른 변칙과 탈법으로 예타 제도의 원칙을 깨고 제도를 무력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국가재정법 제38조 2항 10호를 개정해 지역균형발전 측면의 예타 면제 대상을 발전 정도가 평균 이하인 분야 또는 지역으로 한정해야 한다. 긴급한 상황 대응을 위한 시급성과 특정성의 구체적 범위와 기준을 명시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
 
권경석 전 지방자치발전위 부위원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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