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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블라인드 채용의 함정

중앙일보 2019.02.07 00:12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영선 산업 1팀 기자

전영선 산업 1팀 기자

“요즘은 인턴 자리 하나도 ‘완성체’라야 구하는 것인가?”
 
나이 먹어감의 장점은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다가도 좀 일찍 태어나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설 연휴 예능프로그램인 ‘슈퍼인턴’(Mnet)을 보면서 오랜만에 이런 생각을 했다. 2회까지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상장사인 연예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 정직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인턴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이나 학력, 그 어떤 스펙도 보지 않고 블라인드로 참가자를 선발해 과제를 해결하면 꿈의 직장(엘리베이터에서 배수지를 볼 수 있다!) 입사 기회가 주어진다. ‘무스펙’을 표방한 만큼, 고교 3년생에서부터 경단녀까지 13명이 인턴 기회를 잡았다. 경쟁률은 461대 1. 보통 서바이벌이 그렇듯, 한 명씩 차례로 떨어트릴 모양이다. 청년 실업률 9% 시대를 반영한 오락거리다.
 
프로그램의 가장 놀라운 점은 ‘고작’ 인턴에게 기대하는 역량이다. 걸그룹 ‘트와이스’ 외 이 회사 아이돌 그룹의 올해 마케팅 전략을 짜라고 한 뒤 이 회사 대표인 가수 박진영씨의 냉혹한 평가가 가해졌다. ‘컨설팅 개념조차 무엇인지도 모른다’ ‘고객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지 못한다’ ‘진지하지 못하고 예능처럼 접근한다’ 등의 지적은 점잖은 편이다. 팀별 프레젠테이션을 보다 속이 탄다며 아이스크림을 사다 나눠 먹으면서 화를 달랬다. 극적인 상황이 필요한 예능이라 나온 연출, 연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은 현 한국 취업 시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구인자는 잔인하고, 구직자는 불안해 무리수를 둔다.
 
블라인드 채용 유행에 한국의 거의 모든 대기업은 ‘오디션 전형’ ‘챌린지 전형’ ‘바이킹 전형’ ‘열정 전형’ 같은 쇼적 요소를 가미한 채용 과정을 신설했다. 일정 비율을 ‘전적으로 능력’만을 보고 뽑는다고 자랑하지만, 이 말은 함정이다. 어떤 정도의 능력을 요구할지는 뽑는 자의 마음이다. 실무 평가에서는 통상 해당 기업의 골칫거리가 단골 과제로 주어진다. 만약 자동차 제조사 인턴에게 부진한 미국 시장 반등을 이끌 SUV 모델을 만들어 보라거나, 철강사 인턴에게 미국 통상 마찰에 대응방안을 마련해보라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솔직히 세상에 없는 해법이 나올 리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보지 않겠지만 자신들이 놀랄만한 능력을 보여달라고 하는 것은 평등이고 정의일까. 학점도, 영어 성적도, 전공도, 자격증을 보지 않는 대신 또 다른 장벽이 세워진 것은 아닐지. 무스펙 전형에 대비한 비책을 알려준다는 취업 코디네이터가 등장한 것은 이 시대의 코미디다. 차라리 영어성적표를 내라는 게 인간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전영선 산업 1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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