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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이것은 연금인가, 조폭인가”

중앙일보 2019.02.07 00:11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이것은 갈비인가 통닭인가.”
 

국민연금 ‘경영 참여’는
기업 길들이기 전초전

그냥 웃고 즐기면 될 일이었다. 왜 하필 국민연금을 떠올렸을까. 못 말리는 직업병이 영화 ‘극한 직업’을 보면서도 터져 나올 게 뭐란 말인가. 설 연휴 전날 국민연금은 기어코 ‘정치적 결정’을 내렸다. 그 행태가 영화 속 조폭 생리와 어찌나 닮았는지, 세 장면만 비교해보자.
 
#1. 나이트 먹으려면 오락실 친다=영화 속 조폭 졸개 왈 “(거대 조폭이) 쪼매난 오락실을 왜 치겠나. 다 옆집 나이트클럽에 생각이 있는 것 아니겠냐”. 국민연금은 지난 1일 대한항공의 지주사 한진칼에 대해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결정했다. 국민연금 측은 “경영 참여 조항 중엔 가장 수위가 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외이사 선임, 조양호 이사 해임 같은 ‘센 주먹’은 안 쓰고 정관 변경이라는 ‘가장 약한 주먹’을 썼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국민연금의 경영 간섭은 그 자체가 위헌 소지가 있다. 헌법 제126조는 “국방상 또는 국민 경제상 간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 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런 부담을 떠안고 국민연금이 무리수를 둔 이유가 뭐겠나. 고작 대한항공 하나 손보겠다는 뜻이겠나. 그러니 ‘나이트(재계 길들이기) 먹으려고 오락실(대한항공) 쳤나’는 의구심이 나오는 것이다.
 
#2. 보스 한마디에 바뀐다=영화 속 조폭 조직의 자금줄 정 사장은 보신주의자다. 마약 거래에 깊이 발 담그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정 사장을 보스는 한칼에 바꿔놓는다. 중간 보스의 다리 힘줄을 정 사장 보는 앞에서 끊어놓은 것이다. 다음은 일사천리. 정 사장은 자금을 총동원해 치킨집을 인수한 뒤, 이를 전국 체인화해 마약 보급 루트로 삼는다.
 
보건복지부 박능후 장관이 보신주의자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가 수없이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친 것은 틀림없다. 그는 이를 위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통하겠다”고 말해왔다. 국민연금이 정치에 휘둘리지 않도록 만든 안전장치가 수탁자위원회다. 전문가 14명이 ‘오로지 국민연금의 주인인 2200만 가입자의 이익’만 생각해 결정할 수 있도록 따로 만든 기구다. 그 수탁자위가 지난달 23일 1차 회의에서 격론 끝에 “주주권 행사 불가”를 결정했다. 복지부도 관련 보도자료를 냈다. 그런 복지부를 대통령은 한 마디로 바꿔 놓는다. "국민연금을 통해 대기업 대주주 탈·위법을 엄중 처벌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자 끝났던 수탁자위가 다시 소집됐지만 유야무야, 결국 박능후 장관은 사흘 뒤 국민연금 최고 의결 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수탁자위의 결정을 뒤집고 ‘주주권 행사’를 의결했다. 12명 위원 중 5명이 반대하자 박 장관이 중재에 나서 표결도 없이 밀어붙였다는 후문이다. 이날 회의에서 한 시민단체 측 위원은 "기금위 결정이 대통령을 비롯해 국민의 초관심사인데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3. 그러다 결국 다 깨 먹고 감방 갔다=영화 속 정 사장의 노림수는 그러나 무참하게 실패한다. 조폭이 치킨집을 차린들 장사를 해본 적 없는 깡패들이 뭘 하겠나. 일은 안 하지, 고객과 걸핏하면 싸우지, 서비스·맛·품질이 금세 형편없이 망가졌다. 국민연금의 미래는 어떨까. 기업 경영을 해본 적 없는 노조와 시민단체, 정부 관료들이 뭘 하겠나. 멀쩡한 기업 다 망가뜨린 뒤 국민연금까지 쪽박차게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마무리는 영화 속 대사 한 줄을 빌려 쓴다. "지금까지 이런 연금은 없었다. 이것은 내돈인가 정부돈인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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