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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연휴에 가족끼리 싸웠다고요?
백성호의 현문우답

설연휴에 가족끼리 싸웠다고요?

중앙일보 2019.02.04 07:02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vangogh@joongang.co.kr
 
 
설 연휴입니다. 가족과 친지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뜻밖의 상황이 벌이지곤 합니다. 화목해야할 설날에 오히려 서로 상처를 주고 받지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숭산 스님의 제자인 대봉 스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입니다. 대봉 스님은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목격한 이야기를 하나 꺼내더군요.  
 
슈퍼마켓에서 대여섯 살쯤 된 형과 동생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대봉 스님은 그쪽을 쳐다봤습니다. 형이 주먹을 들어서 막 동생을 때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엄마가 보고 말았습니다. 물건을 고르고 있던 아이들의 엄마는 곧장 형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주먹으로 형의 머리를 ‘꽝!’하고 때렸습니다. 그러자 형은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주위에서 장을 보던 사람들이 다들 쳐다봤습니다. 슈퍼마켓 안에 쩌렁쩌렁 울음소리가 울렸거든요. 당황한 엄마는 아이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터진 울음은 좀체 멈추지 않았습니다.
 
 
엄마는 왜 아이를 때리려고 했을까요? 맞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슈퍼마켓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안 되니까요. 형이 때려서 동생이 울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요. 엄마는 그걸 막으려고 형을 때린 겁니다. 대봉 스님은 “그 모습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똑 닮았다. 정말 비디오 카메라가 있었다면, 촬영을 해서 그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왜냐고요? 아이를 말리려던 엄마가 결국 슈퍼마켓을 더 시끄럽게 만들고 말았으니까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이들의 엄마는 대체 무엇을 놓치고 있던 걸까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도 각자의 일상에서 비슷한 일을 수시로 저지르고 있진 않습니까. 저는 아이들의 엄마가 놓친 것은 다름 아닌 ‘씨앗과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씨앗과 어떤 열매일까요?
 
나의 하루가 나의 텃밭
 
농사를 짓는 농부만 씨앗을 심는 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날마다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아니, 나는 조그만 텃밭도 가꾸지 않는데 무슨 씨앗을 심는다는 거지?’ 이렇게 따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나만의 텃밭’을 날마다 가꾸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바로 ‘나의 하루’입니다.  
 
 
나의 하루는 작은 텃밭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많은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밤에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하는 말들, 우리가 떠올린 생각들, 우리가 했던 행동들. 그 모두가 하나씩의 씨앗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하루 동안 심는 씨앗은 정말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게 ‘씨앗’이라는 생각을 잘 못합니다. 열매가 열리는 씨앗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까먹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씨앗과 열매 사이에 연결된 가느다란 끈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아침 출근길, 붐비는 지하철에서 낯선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습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생깁니다.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씨앗 중 어떤 씨앗을 쓸 것인가. 그런 결정을 하게 됩니다. 일단 A, B, C라는 세 가지 씨앗만 살펴볼까요. A라는 씨앗은 상대방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겁니다. B라는 씨앗은 “죄송합니다!”하고 먼저 사과하는 겁니다. C라는 씨앗은 “이봐요, 조심하세요”하고 경고조로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씨앗이든 마음대로 꺼내서 쓸 수가 있습니다. 왜냐고요? 모두 다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씨앗이니까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A를 택하면 내 속이 좀 후련해지지 않을까? 아니야, C를 고르는 게 더 속시원할 것 같은데.” “B를 고르면 무난한긴 한데, 세게 부딪혀서 생긴 화는 안 풀릴 것 같애.” 아주 짧은 시간에 즉각적으로 씨앗을 고릅니다. 그런데 씨앗을 고를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 씨앗을 따라서 열리는 열매입니다.  
 
씨앗마다 다른 열매가 따라옵니다. 가령 씨앗A를 심어서 상대방을 노려보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도 당연히 나를 노려볼 겁니다. 서로의 마음이 빳빳하고 불편해지겠죠. 씨앗C를 심으면 어찌 될까요. “이봐요, 조심하세요”라는 말에 “이 자식이 뭐라고? 네가 먼저 부딪혔잖아!”하면서 시비가 붙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 씨앗B를 심으면 어떨까요. 상대방도 “죄송합니다”하고 답하거나, “네에, 괜찮아요”하며 부드럽게 넘어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만히 따져보세요. 씨앗을 심을 때 이미 열매는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고요? 콩의 씨앗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의 씨앗을 심으면 팥이 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씨앗A나 씨앗B를 심어놓고서 씨앗C의 열매가 열리길 바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씨앗 따로, 열매 따로’ 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씨앗 따로, 열매 따로’ 볼까요? 씨앗과 열매를 함께 보지 못할까요?
 
씨앗이 곧 열매
 
씨앗을 심고 열매가 열리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씨앗은 3초 만에 열매가 열리지만, 다른 씨앗은 하루, 또 다른 씨앗은 한두 달씩 걸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씨앗만 보입니다. 길고 짧은 시차를 두고 열리는 열매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씨앗과 열매 사이에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은 보질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합니다. “정말 재수가 없네. 왜 하필 나한테만 이런 일이 자꾸 생기지?”라고 불평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이 심은 씨앗은 보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씨앗으로 인해 지금 내 눈 앞에 이런 열매가 열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씨앗이 곧 열매’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씨앗을 심을 때 이미 열매를 생각합니다. “어떤 씨앗을 심을까?”하는 고민은 “어떤 열매를 거둘까?”하는 고민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씨앗 속에서 미리 그 열매를 보고, 그 열매 속에서 또 씨앗을 보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과 속에도, 포도 속에도, 수박 속에도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온갖 과실의 열매 속에는 씨앗이 들어있는 겁니다. 씨앗과 열매, 열매와 씨앗. 그게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걸 실생활에 접목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혹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이런저런 행동을 할 때 그 열매까지 내다보는 겁니다. 씨앗을 뿌린 뒤에는 살펴야 합니다.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서, 어떤 열매로 맺히는지 말입니다. 내 말을 듣고 상대방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지, 아니면 더 언짢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지. 아니면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기는지 말입니다.  
 
 
그렇게 씨앗과 열매, 열매와 씨앗, 씨앗과 열매가 돌아가는 걸 꿰뚫다 보면 우리의 눈도 점점 깊어집니다. 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가족과 대화를 나눌 때도, 직장에서 전략을 세울 때도, 현장에서 고객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씨앗 속에서 열매를 보는 겁니다. 또 열매 속에서 씨앗을 보는 겁니다. 씨앗과 열매는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설연휴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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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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