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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귤이 탱자가 되는 까닭

중앙일보 2019.02.01 00:28 종합 24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스위스 취리히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30분쯤 달리면 소도시 추크(ZUG)가 나온다. ‘암호화폐의 성지’로 통하는 곳이다. 인구 3만명의 미니 도시. 국제공항이 없어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전 세계의 블록체인 업체들과 CEO, 전문가, 정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추크가 암호화폐 성지가 된 건 ‘작은 정부’와 ‘개방성’ 때문
혁신성장 성공하려면 시장과 생태계 육성으로 방향 틀어야

‘암호화폐=다단계 사기’쯤으로 통하는 한국에서 보면 웬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인가 싶다. 신기루와도 같은 암호화폐가 전 세계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기고 있으니. 호기심이 발동돼 휴가 일정을 쪼개 추크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추크의 별칭은 크립토밸리(Cryto Vally)다. 이더리움 본사 등 글로벌 블록체인 업체 250여 곳이 입주해 있고 금융, 법률, 회계, ICT(정보통신기술) 같은 연관 서비스 회사들이 따라 들어오면서 거대한 클러스트가 형성됐다. 우리는 금지하고 있는 ICO(암호화폐를 통한 자금 모금)도 여기선 합법이다. 그렇지만 상점에서 비트코인으로 결제가 이뤄지고 주차요금이나 세금을 암호화폐로 납부하는 모습을 상상하진 마시라. 시내 곳곳을 쏘다녔지만 ‘비트코인 받음’ 표지가 붙은 상점을 겨우 몇 개 발견했을 뿐 코인으로 물건을 사거나 밥값을 지불하는 걸 보지 못했다. ‘블록키모’라는 블록체인 기반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는 바스티앙 돈 대표는 “암호화폐와 블록체인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이다.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폐의 역할을 대체할 만큼 완전하지 않다”고 설명한다.
 
검증되지도 않은 불안전한 기술에 시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단 말인가. 추크시 경제지원국의 로먼 바이스가 배경을 설명해준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2014년 이더리움 재단 창립자가 찾아왔다. 당시 19, 20세였는데 어떻게 세상을 바꾸고 싶은지 설명했다. 우리는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들었고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판단했다. 블록체인이 분산 처리되는 데이터베이스인 점을 감안하면 결국 모든 회사를 위한 기술 아닌가. 이더리움이 들어오고 난 이후 더 많은 기업이 들어왔고, 클러스트(크립토밸리)가 형성됐다. 우리는 오픈 마인드로 대했을 뿐이다.”
 
기업에 어떤 특혜를 주나.
“특정 기업에 세금 감면을 해주거나 보조금을 주지 않는다. 어느 기업을 지원할지 결정할 권한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건 시장의 몫이다. 우리는 그런 기업들이 모여있는 생태계를 지원한다. 블록체인 회사들이 다른 업종의 기업들과 협력해 양질의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어가도록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추크엔 블록체인 기업만 있는 게 아니다. 제약, 메디테크, 하이테크, 원자재 기업도 많다. 모두에게 동일한 혜택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결은 이처럼 ‘작은 정부’와 ‘개방성’에 있었다. 진입장벽을 허물고 규제를 풀어 새로운 산업과 시장이 돌아가도록 생태계를 육성하는 것이다. 산업이 일어나면 일자리가 생긴다. 소득은 저절로 는다. 정부가 천문학적 숫자의 재정을 투입하지 않아도, 감 놔라 배 놔라 시시콜콜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돌아간다. 이게 자유시장 원리다. 정부는 막힌 곳을 뚫어주고 룰을 어기는 시장 참여자를 감시하는 것만 하면 된다.
 
필요 없는 규제를 없애고 창의적인 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혁신성장 정책은 근본적으로 ‘작은 정부’ 전략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정부는 간섭도, 규제도 하지 않고 혁신하는 기업을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혁신성장을 외쳐도 활기가 되살아나지 않고 성과가 따르지 않는다. 수조 원의 예산을 지원한다는데도 기업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일부 중소기업들은 정부 지원금과 똑같은 금액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어려움을 호소한다. 일감 몰아주기의 과도한 적용,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 등으로 기업인들은 언제 감옥 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싸여 있다.
 
정부가 말로는 혁신성장을 외치면서도 ‘큰 정부’의 패러다임과 ‘폐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사회적 약자의 소득을 높여 분배를 개선한다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버리지 않고 혁신성장을 이루겠다는 것은 말장난이거나 무지에서 나온 이상론이다. ‘큰 정부’와 ‘작은 정부’가 공존할 수 없는 건 초등학생도 안다. 특수목적고, 자율형 사립고를 없애면서 혁신성장을 선도할 과학기술, ICT 인재 수만 명을 양성하겠다니 이게 될 말인가.
 
‘큰 정부’ 패러다임에 빠지면 정부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심한 경우 정부가 심판대에서 내려와 선수로 뛴다. 소상공인을 위한다며 정부가 직접 민간 영역인 결제시장에 뛰어든 제로페이 정책이 대표적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해 추크를 방문하고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현지에서 ‘서울을 블록체인의 중심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마스터 플랜을 발표했으니 말이다. 이 계획이 어떻게 굴러갈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서울시가 엄청난 예산을 홍보비에 쓰면서 제로페이를 밀어붙이고 있으니 말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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