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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진보 경제학자들의 실사구시 합창

중앙일보 2019.01.30 00:25 종합 27면 지면보기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박근혜 정권 초기인 2013년 6월 진보 성향의 중견 경제학자 10명이 펴낸 『실사구시 한국경제』가 화제였다. ‘통념을 허무는 10가지 진단과 해법’, 이 부제에서 엿보이듯 좌파의 보수 정권 비판이라기보다 좌우 진영논리를 뛰어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국정 해법을 모색한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의 고질적 난제들은 왜 해결 가닥은커녕 사회적 갈등만 증폭시키는지에 천착했다. 소득 불평등, 일자리 절벽, 중국·북한 변수, 부동산, 정부재정, 원자력발전, 사교육 등 하나같이 까다로운 거대 담론이었다.
 

박근혜 정권 초 나온 진보학계의 『실사구시 한국경제』
이념 대신 현실 밀착하라는 고언, 진보 정권에 더 절실

서문은 6년 전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상황 같다.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 논리로 모든 사안을 진단하는 한국사회의 지적·사회적 풍토에 문제가 있다. (같은 통계를 놓고 정반대 해석을 하기 일쑤!)… 우리는 누가 보수주의자인지 진보주의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를 자주 만난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와 같은 사례!) 아직도 1980년대 보수 대 진보의 시각으로 2013년 한국사회를 보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80년대에 무얼 했나. 전두환 독재체제의 질곡을 학문의 힘으로 풀겠다는 일념에 대부분 해외유학 대신 국내 대학에서 한국경제 공부에 몰두한 토종 학자들이었다. 홍장표 부경대 교수(현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장)는 서울대 전체수석으로 학부를 우등졸업한 수재였지만 대개 해외유학을 택하던 시절 모교에 남아 경제학 박사를 했다. ‘청년실업 해법’ 편에서 “중소기업 진흥을 통해 나쁜 일자리를 좋은 일자리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일자리통계 논란 속에 통계청장에 임명된 강신욱 박사는 ‘소득 불평등’ 편을 썼다.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의 회고. “80년대 당시 운동권은 PD와 NL 노선 투쟁이 극심했고 그 무게중심이 종북세력과 주사파 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우려해 온건 개혁 쪽에 공감했던 이들의 모임이었지요.” 책 발간을 위해 수년 동안 거의 매달 한 번 한국경제 세미나 모임을 했다. 그 공부방이 학현학파의 본산인 서울 광화문 서울사회경제연구소(이사장 학현 변형윤). 일부 저자는 현 정권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
 
이념과 선의를 앞세운 작금의 국가운영에 대해 “뜻은 크나 일은 거칠다” “일보다 말이 앞선다”는 혹평이 늘고 있다. 좌고우면이 부족한 ‘갑툭튀(갑자기 툭 튀어나온)’ 정책을 땜질하느라 사회갈등과 국력 낭비가 심하다. 역사에 남을만한 어록도 어느 정권보다 풍부한 편이다. “우리에게 민간인 사찰 DNA는 없다” “집 한 채만 남기고 다 파시라” “(5060) 험한 댓글만 달지 말고 (기회 많은) 아세안으로 가라” 등등. ‘비정규직 제로’ ‘최저임금 3년 내 1만원’ 같은 엄청난 약속은, 옳은 정책 방향이라 하더라도 현장과 경험을 중시하는 실사구시 위정자라면 겁나서 쉽사리 하지 못한다. “굶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내가 책임진다”던 룰라 전 대통령의 브라질은 오늘날 그의 호언과 딴판이다.
 
장자는 꿈과 생시를 넘나드는 몽환적 ‘나비의 꿈’을 이야기했지만, 뇌과학자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는 믿음을 현실과 착각하는 이들에게 꿈과 현실을 대비해 경종을 울린다. “눈을 크게 뜨고 세상 바라보며 핸들을 교정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두 눈 감고 오로지 기억과 믿음을 기반으로 운전하는 것이 꿈이다.”
 
『실사구시 한국경제』에는 이런 고백도 있다. "과도하게 이념적 지향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 몇가지 관념적 이데올로기 구호가 사고의 폭을 제한함을 걱정하며, 구체성 없는 추상성의 무기력함도 뼈져리게 느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올 초 한 언론단체 초청 토론회에서 “문재인 집권 3년 차니만큼 실사구시 측면의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사람을 쓸 때”라고 말했다. 작년 말 문 대통령과의 청와대 오찬 때 “요즘도 혼밥 드시느냐”고 농반진반의 돌직구를 날린 그였다.  
 
청컨대 식사 정치와 소통 증진을 주문한 데 이어 다음번 대통령 회동 때에는 실사구시적인 국정운영을 건의하면 어떨지, 그러면서 6년 전 보수 정권 때 이미 화제가 된 『실사구시 한국경제』 한 권 선사하면 어떨지.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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