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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수급 창피한데 벗어날 길 없는 49세

중앙일보 2019.01.30 00:06 종합 1면 지면보기
2019 빈곤 리포트 <상>
조건부 기초수급자 윤귀선씨가 지난 17일 4년째 살고 있는 서울 이대역 인근 고시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2017년 기초수급자가 된 윤씨의 수입은 생계비·주거비 지원금 월 70만원이 전부다. [최정동 기자]

조건부 기초수급자 윤귀선씨가 지난 17일 4년째 살고 있는 서울 이대역 인근 고시원으로 들어가고 있다. 2017년 기초수급자가 된 윤씨의 수입은 생계비·주거비 지원금 월 70만원이 전부다. [최정동 기자]

“이 고시원에서 저 고시원으로, 20년 가까이 그렇게 옮겨다니며 살았어요.”
 
17일 오후 5시 서울 이대역 앞에서 만난 윤귀선(49)씨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윤씨의 집은 4층 건물 꼭대기 고시원이다. 길 건너엔 내년 입주를 앞둔 고급 신축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고시원은 한 층에 28개의 방으로 빼곡했다. 복도는 두 명이 비켜가기 힘들 정도다. 윤씨 방은 3.3㎡(1평) 남짓. 책상·TV장·침대로 꽉 찼다. 천장에는 빨랫대가 거미줄처럼 걸려 있고, 외투와 빨래가 주렁주렁 널려 있다. 침대는 다리를 간신히 뻗을 만큼 작고 좁다. 4년째 살고 있고 보증금 없이 월세 23만원을 낸다.
 
윤씨는 2년 전 ‘조건부 기초수급자’가 됐다. 재산·소득이 거의 없지만 근로 능력이 있어 조건부가 됐다. 월 생계비·주거비 지원금 70만원이 유일한 수입이다. 월세 내고 47만원으로 한 달을 산다. 기자가 “기초수급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네요”라고 물었다.
 
“아직 젊은데, 나이 마흔아홉에 이렇게 기초수급 받고 사는 게 창피하고 부끄럽죠. 아직 젊잖아요.”
 
윤씨는 기자가 처음 명함을 건넸을 때부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창피하다”는 말을 할 때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는 왜 젊은 나이에 기초수급자가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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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는 2016년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다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는 게 전부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비만 65만원이라는 얘기를 듣고 급히 병원을 되돌아 나왔다. 기자가 “디스크냐”고 몇 차례 물어도 답을 피했다. 한두 시간 서 있으면 심한 통증이 온다. 그래서 2017년 기초수급자가 됐다. 윤씨는 “나보다 나이 많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많은데 기초수급자 신청을 하는 게 꺼려졌고 부끄러웠다”며 “몸만 아프지 않으면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데, 수급자 되기 싫어서”라고 털어놨다. 그의 바람과 달리 다친 허리로 더는 건설 현장 일을 구할 수 없었다. 일을 못 나가니 고시원비마저 밀리기 시작했다.
 
그는 월~목 매일 아침 1시간 거리에 있는 자활센터로 출근한다. 지역 청소와 콘센트 조립 등 단순 작업을 한다. 이걸 이행하지 않으면 지원금이 끊긴다. 그는 하루에 1만2000원 정도를 쓴다. 버스비 3000원, 구내식당 점심 3500원, 나머지는 저녁용 김이나 김치 구입에 쓴다. 이런 반찬으로 고시원에서 주는 밥을 먹는다. 일을 쉬는 주말엔 거의 고시원 안에 틀어박혀 지낸다. 한 달에 한두 번 바깥 식당에서 5000원짜리 점심 뷔페 ‘특식’을 사먹는 게 유일한 낙이다.
 
“주말엔 방에서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면서 멍하니 있죠. 나가면 1000원이라도 돈을 쓰니까….”
 
“언젠간 자립해야죠 … 70만원 수입서 월 10만원 청약저축”
 
윤씨의 집은 대대로 가난했다. 그는 전남 나주에서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모는 무학(無學)으로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고 재산 한 푼 남기지 못했다. 윤씨의 부모도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는 노점상을 하다 윤씨가 7세 때 원인 모를 병으로 숨졌다. 윤씨는 “아버지는 평생을 특별한 직업 없이 한량처럼 살았다”고 기억했다. 자식들 앞으로 남긴 건 아무것도 없다.
 
어린 윤씨 형제를 키운 건 큰누나(72)다. 윤씨는 초등학교까지만 다녔다. 15세 때 “식당 배달 일을 해주면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고향 이웃의 말을 듣고 상경했다. 그는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던 10대 후반을 인생의 전성기로 여긴다. 그는 “그때 돈으로 월 10만원 정도 벌었는데 먹고 싶은 거 먹고 나름대로 풍족하게 살았죠.” 일하면서 악착같이 공부해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윤씨는 “누나가 기술을 배우라고 조언했는데 철이 없어 뭘 몰랐다. 특별한 꿈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이제 와서 후회된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 그는 건설 현장, 음식점, 자동차 정비소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모은 돈으로 2005년 수원에서 식당을 열었지만 1년 만에 망했다. 남은 돈 100만원을 손에 쥐고 서울로 돌아와 고시원 생활을 이어 왔다.
 
“결혼 생각은 안 해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윤씨는 “진작 포기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릴 땐 중학교도 못 나왔다는 생각에 이성을 만나는 걸 망설였다. 20대 이후로는 ‘남의 집 귀한 딸 고생시킬 바엔 결혼을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형제들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모두 결혼을 못 했다. 큰형(65)은 고향에서 동네 농사일을 돕고 일당을 받아 먹고 살았고 지금은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다. 작은형은 24세에 상경해 공장일을 해오다 3년 전 술병으로 숨졌다. 그나마 큰누나는 결혼해서 2남3녀를 낳았다. 형편이 어려워 오래전 기초수급자가 됐다. 나머지 두 누이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윤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주택청약통장에 매달 10만원씩 넣고 있다”며 웃었다. 그는 탈(脫)수급의 꿈을 꾸고 있다.
 
“앞으로 10년을 살더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 거예요. 가진 게 없어 돈으로 남을 돕진 못하겠지만 어서 건강을 회복해서 몸으로라도 남을 도우며 살고 싶습니다.”
 
◆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이에스더·이승호·김태호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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