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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 드레스 못 사 입은 엄마, 다음 생엔 내 딸로 태어나요

중앙일보 2019.01.29 11:00
[더,오래]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7)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친정에 자주 가는 편이다. 친정에 가면 하나뿐인 손녀딸이 귀여운 친정 엄마·아빠는 종일 이거 해줄까 저거 해줄까 하며 아이와 즐겁게 지낸다. 그 덕에 나는 살림도 육아도 내려놓고 늘어져서 아무것도 안 한 채 쉬곤 한다.
 
엄마는 그럴 거면 방에 들어가 자라고 하는데 집에 있으면 항상 늦게 퇴근하는 신랑 때문에 거의 모든 시간을 딸과 단둘이서 덩그러니 보내는 게 외로웠는지 함께 무얼 하지 않더라도 친정 엄마·아빠와 아이와 한 공간에 북적이며 있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다. 그래서 늘 거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세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리모컨을 점령한 채 TV를 보거나 낮잠을 잔다.
 
한 이불 속에 잠자는 딸과 친정 엄마, 아버지
나른한 주말 오후 졸려 하는 아이를 보고 친정 엄마는 나보다 더 빠르게 이불을 갖고 나와 보일러 온도를 올리고 바닥에 깔아준다. 친정 아빠는 ‘이건 당연히 내 담당이지’라는 듯이 아이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한참을 셋이 까르르 웃기도 하고 이상한 옛날이야기를 지어서 들려주기도 하더니 나만 빼고 어느새 셋이 잠이 들었다.
 
나는 소파 위에서 평소에 보지 못한 드라마나 예능을 몰아 보고 있었는데 소파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세 사람 모습을 보니 딸아이가 꼭 나 같았다.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내가 4살 무렵 지금보다 젊은 엄마 아빠와 내가 꼭 저렇게 누워 있었겠지, 나도 저렇게 토닥여줬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싶었다.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찰나의 순간이긴 하지만 기분이 묘하다. 사진을 보는 듯도 하고 동화책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고 영화 속 회상 신을 보는 것도 같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어느 날 출근준비를 하는 친정 아빠에게 친정엄마가 “00야~ 할배  나간다. 인사해야지~” 하며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가 현관문 앞에서 “할배, 빨리 와. 올 때 과자 사와”라고 말하는 딸에게 친정 아빠는 연신 미소를 띠며 “그래그래, 당연하지. 할배 빨리 올게. 뽀뽀”라고 하더니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신이 나는 모습이었다. 그 셋의 대화에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게 조금 서운할 정도로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멀찌감치 서서 “다녀오세요” 하고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엄마, 나 어릴 때도 아빠가 나 저렇게 예뻐했어? 아니지?” 하고 물었다. “너 아기 때 사진 봐. 다 아빠가 종일 너만 안고 있잖니? 속도 많이 썩였지만 애들한텐 참 잘했어.”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 안아주는 거 말고 저렇게 웃고 예쁘다고 말도 했느냐고.” “그럼, 당연하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문득문득 아이를 돌보는 친정 엄마·아빠의 자연스러운 행동·표정·손짓에서 나 어릴 때도 저랬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보게 됐다. 특별한 날의 모습보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 더 그렇게 다가온다.
 
마트에 간다고 나와 딸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친정엄마의 뒷모습, 유난히 생선을 좋아하는 딸에게 가시를 하나하나 발라주고 물을 먹여주는 모습, 이제 아기도 아닌 딸을 세워놓고 후딱 씻겨 나오면 될 텐데 감기든다며 굳이 큰 통에 뜨끈하게 물을 받더니 몇 번이고 손을 담가 온도를 확인하고 친정 엄마·아빠가 통에 둘러앉아 조심스레 씻기는 모습, 가만히 TV 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사랑받고 귀염받고 자랐겠지 싶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한번은 친정엄마가 장난감을 앞에 두고 노는 아이 뒤로 가서 꼬리 빗으로 머리를 싹싹 빗어 내가 어릴 때 했던 머리와 똑같이 묶어주는 걸 봤다. ‘아직도 저 머리밖에 못 해?’ 하고 혼자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엄마는 머리 묶는 재주가 없어 머리 묶고 오라고 날 옆집으로 보내곤 했는데 나도 엄마를 똑 닮아 딸아이 머리를 잘 못 묶어 준다.
 
누구나 그렇게 넘치게 사랑받는 어린 시절이 있었을 텐데, 어른이 되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 참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친정 부모님은 애정을 가득 딸아이에게 주곤 한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최근에 친정에 갔을 때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내 옆에 찰싹 붙어 내 팔을 만지작거리는 딸과 내 모습을 본 친정엄마가 피식 웃으며 “지금 너희 둘 모습 꼭 어릴 때 엄마랑 너 보는 것 같다. 네가 저렇게 꼭 엄마 옆에 붙어서 살을 만지면서 잤어”라고 했다. 친정 아빠까지 부르며 “봐봐 여보, 똑같지?”라고 한다.
 
내가 엄마와 딸의 모습에서 나의 어릴 적을 보는 것처럼 엄마도 나와 딸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와 어린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와 아이가 같이 자는 서로 똑 닮은 모녀의 얼굴에서나 딸과 놀아주는 모습에서 엄마 역시 당신의 지난날을 떠올리며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5살이 된 딸아이는 매일 치마만 입겠다고 한다. 4살 때부터 시작된 드레스 사랑은 한겨울에도 꼭 치마만 입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집에 드레스가 가득하다. 만화 속 주인공이 입는 드레스부터 겨울용 여름용 다양하게도 갖고 있는데 되도록 입고 싶을 땐 입도록 내버려 두곤 하지만 정말 추운 날엔 끝까지 드레스를 입고 나가겠다는 딸에게 화를 내면서 안 된다고 실랑이를 한 적도 많다.
 
어릴 때 치마 입고 싶어도 사줄 사람 없었던 엄마
“얘가 누굴 닮아 이래~?” 하며 씩씩거리는 나에게 친정엄마는 “누굴 닮긴, 널 닮았지. 네가 어릴 때 치마 입고 싶다고 계단 하나 내려가서 울고 하나 또 내려가서 울고 아무리 혼내도 그랬지. 너랑 똑같다”라고 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나도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그럼 나는 누굴 닮았겠어. 엄마 닮았지. 엄마도 분명히 이렇게 치마만 입겠다고 고집부렸을걸.” 내 말을 듣자마자 친정엄마는 콧방귀를 뀌며 “엄만 치마 입고 싶어도 가난해서 누가 사주지도 않았어. 드레스가 웬 말이니”라고 말했다.
 
5살 무렵의 엄마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진도 한장 없다. 엄마 말론 그때부터 할머니는 생선장사를 다니셨고 가난해서 공부도 못했다고 한다. 5살 무렵의 엄마도 분명 드레스가 입고 싶었을 거다. 우리 3대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꼭 빼닮았으니까.
 
엄마가 나에게 준 사랑을 나는 딸에게 주고 딸아인 미래의 자식에게 줄 거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친정 엄마만 조금 손해를 본 느낌이다. 친정엄마는 6남매 중 셋째 딸이었는데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너희 엄마가 제일 착했다고 말할 정도로 순했던 모양이다. 월급을 타면 다 할머니를 갖다 주고 아팠던 외할아버지 수발도 다 들었다고 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친정엄마는 가끔 어릴 때 이야길 하면 즐거운 추억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정말 찢어지게 가난했다고 했다. 그럼 나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 시대엔 다 가난했어” 하고 말았는데 지금처럼 서로 모습을 보며 각자의 어린 시절이나 각자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엄마의 유년기는 하나도 행복한 일이 없었을 것 같다.
 
얼마 전 TV에서 유명한 여자 개그우먼이 다음 생엔 엄마가 자기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이 감동적이긴 했으나 나는 지금도 내 딸에게 대단히 헌신적인 엄마는 아니어서 우리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난다 한들 특별히 잘 해주고 잘 키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림 장윤정]

[그림 장윤정]

 
그래도 엄마가 다음 생에 내 딸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지금 내 딸에게 사주는 드레스보다 훨씬 많이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도 예쁘게 묶어주고 공주님이 나오는 키즈카페에도 데려가 줘야지 하고 말이다.
 
환생까진 너무 먼 미래지만 그저 앞으로도 쭉 아이와 친정엄마와 나 셋이서 서로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하고 추억하며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아쉽고 때로는 미안해하며 오래오래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장윤정 주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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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장윤정 주부 필진

[장윤정의 엄마와 딸 사이] 마냥 아이같은 막내딸로 30년을 편하게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준비도 없이 엄마가 된 미술전공자. 철부지 딸이 엄마가 되는 과정을 그림과 글로 그려본다. 엄마에겐 딸, 딸에겐 엄마인 그 사이 어디쯤에서 기록해보는 삼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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