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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트럼프가 미국은 아니다

중앙일보 2019.01.29 00:12 종합 31면 지면보기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모든 비밀을 공유하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 없이는 비밀을 100% 공유할 수 없다. 미국의 진짜 친구는 누구일까.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 앵글로색슨 4개국이다. 혈연적 뿌리가 같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한다. 미국과 이들 4개국을 통칭하는 용어가 ‘5개의 눈(Five Eyes)’이다. 전 세계를 손바닥처럼 감시하는 비밀정보망인 ‘에셜론(Echelon)’을 공동운용한다. ‘5개의 눈’은 친구를 넘어 가족 같은 운명공동체다. 가족 간에도 갈등은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배신은 하지 않는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는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영원한 동맹이 있다면 이들 5개국이다.
 

한국은 미국의 ‘1급 동맹국’
트럼프가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깰 수 있는 관계 아냐
방위비분담금 대폭증액 원하면
납득할 수 있는 근거 제시해야

공식적으로 미국은 전 세계 48개국과 동맹 또는 군사적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유럽을 중심으로 28개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는 집단안보체제를 형성하고 있고, 동아시아와 중동을 중심으로 20개국과 동맹 또는 우방 관계를 맺고 있다. 친구라고 다 같은 친구가 아니듯이 동맹이라고 다 같은 동맹은 아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5개의 눈’ 다음으로 미국이 중시하는 동맹국은 유럽의 프랑스·독일·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 동아시아의 한국·일본 등 7개국이다. 미국 중심 국제질서의 핵심 파트너로 보는 나라들이다. ‘5개의 눈’이 ‘특급 동맹’이라면 이들 7개국은 ‘1급 동맹’이다.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 부분 비밀과 정보를 공유하는 관계다. 미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최대한 보호해야 할 나라들이다.
 
미국은 전 세계 70여 개국에 약 800개의 미군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는 3개국이 1급 동맹국인 일본(5만2000명), 독일(3만8000명), 한국(2만8500명)인 건 우연이 아니다. 주한 미군의 존재 이유를 남북 분단 상황만으로 다 설명할 순 없다. 한국을 미국의 동맹 지도에서 삭제한다면 해양세력인 미국과 일본은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러시아 등 대륙세력과 바로 대치해야 한다. 특히 ‘떠오르는 용(龍)’, 중국을 견제하려면 한국이란 전략적 요충지를 교두보로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미국이 한국을 동아시아 안보의 ‘린치핀(linchpin)’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 발린 수사(修辭)가 아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은 포기하기 힘든 나라다.
 
배명복칼럼

배명복칼럼

독·불 관계처럼 한·일 관계에도 구원(舊怨)이 얽혀 있다. 유럽을 미국의 그늘 아래 두려면 독일과 프랑스가 사이좋게 지내야 하듯이 한·일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돼야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운신 폭이 넓어진다. 프랑스와 독일이 앙앙불락하면 유럽이 시끄러워지듯이 한국과 일본이 싸우면 동아시아가 흔들린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한국과 일본을 1급 동맹의 품에 끌어안고 가는 것이 미국엔 이익이다. 핵무기를 가진 프랑스를 제외한 한국, 일본, 독일 세 나라에 미국이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순위를 매기는 미국의 ‘랭킹(ranking) 사이트’들이 평가하는 ‘베스트 동맹 10개국’ 명단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나라가 이들 4개국이다. 한국을 미국의 최고 동맹국으로 꼽은 사이트(shareranks.com)도 있다. 일본이 미국의 ‘갑옷(armour)’이라면 한국은 미국의 ‘무기(weapon)’라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면서 돈 때문에 한·미 동맹에 금이 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 비용 중 한국 측 부담액을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대폭 올려주지 않으면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만족할 수준의 증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있을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협상 카드로 사용할지 모른다는 걱정마저 나온다. 이미 그런 경고성 발언들이 워싱턴 쪽에서 나오고 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트럼프의 성향을 고려하면 완전히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무턱대고 수용해야 하나. 그럴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근거를 미국에 요구하며 따질 건 따져야 한다. 그것이 혈세로 방위비를 부담하는 국민에 대한 도리다. 한·미 동맹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미국이 한국에 소중한 만큼 한국도 미국에 소중하다. 트럼프 한 사람이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깰 수 있는 한·미 동맹이 아니다. 그런 관계라면 이미 파탄이 났어도 여러 번 났어야 한다. 진정한 우정은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협상은 절충점을 찾아 타결될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은 아니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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