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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책 8권을 20권 전집과 바꿔왔더니…

중앙일보 2019.01.28 15:00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1)
TV를 보던 아내가 자신이 암에 걸리면 내가 죽이라도 끓여주겠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취사병을 일 년이나 했다고 끼니 대령하는 건 염려 말라고 했다. [중앙포토]

TV를 보던 아내가 자신이 암에 걸리면 내가 죽이라도 끓여주겠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취사병을 일 년이나 했다고 끼니 대령하는 건 염려 말라고 했다. [중앙포토]

 
TV 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한마디 던진다. 자기가 암에 걸리면 내가 죽이라도 끓여주겠냐는 거다. 이건 시비다. 옆에 드러누워 잠자코 책을 뒤적이던 이 몸, 심기가 불편해지니 대답이 고울 리 없다. 취사병을 일 년이나 했다고, 자리를 보전하면 끼니 대령하는 건 염려 말라고 했다.
 
얼굴 본 지 50여 년, 한 이불 덮은 지 30년이 훌쩍 넘긴 우리 안방마님이 절대 지지 않는다. 내가 환자가 있는 가족들의 대처법을 다룬 책이나 들추면 들출 거라 즉각 반박한다.
 
이건 뜨끔하다. 이미 집에서 ‘납작 만두’란 판정을 받은 데다가 결혼을 앞두고 ‘부부 의학’이니 뭐니 해서 너덧 권의 책을 들척이며 신혼생활을 연구(?)한 전력을 지적한 것이니 조용히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할 말이 많다. 아버지 친구분의 딸과 가시버시로 살게 된 데도 책이 큰 역할을 했다. 어릴 적에 기저귀를 찬 채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물론 사진으로 확인한 것이지 기억엔 없다- 꼬맹이를 ‘어, 괜찮은 처자네’라고 생각한 것도 그녀가 읽는 책을 본 것이 계기였다.
 
대학 1학년 때 그 집으로 놀러 갔다가 여중 1년생이 호오도온의 『주홍글씨』를 읽는 걸 봤다. 그때 내심 ‘벌써 이 정도의 책을 읽다니’ 한 것이 호감의 시작이었다. 물론 이제 아내는 자신의 청춘을 차압한 ‘표적 결혼’이니 ‘음모론’을 꺼내긴 하지만 말이다.
 
『주홍글씨』, 너새니얼 호손, 문예출판사. 대학 1학년때 여중 1년생(지금의 아내)이 『주홍글씨』 읽는 걸 봤다. 그때가 호감의 시작이었다.

『주홍글씨』, 너새니얼 호손, 문예출판사. 대학 1학년때 여중 1년생(지금의 아내)이 『주홍글씨』 읽는 걸 봤다. 그때가 호감의 시작이었다.

 
아내와 책은 내 평생의 반려
내 평생의 반려라 할 아내와 책에 얽힌 사연은 수두룩하다. 결혼 전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법’이란 두툼한 잡지부록을 우연히 구해 아내에게 시집살이 사전 교육을 하기도 했다. (이런 버릇은 여전해 운전면허를 따기 전엔 핸들 잡는 각도, 평행주차 요령 등을 담은 운전 교본을 먼저 읽어 아내를 기함시킨 적도 있다) 그런 심모원려 덕분인지 아내는 큰 소리 내지 않고 30년 넘게 3대가 어울린 살림을 아내는 잘 꾸려갔다.
 
그 ‘시어머니…’ 책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내에게 건네주기 전에 내용을 살펴봤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구절들이 있다. 고부가 함께 목욕하라든지, 시어머니께 비키니 수영복을 사 드리라든지, 아내와 외식, 여행하기 전에 부모님을 먼저 대접하라든지 그런 소소한 것인데 그 중엔 지킨 것도 있고 못 지킨 것도 있다. 처방의 효과보다 책으로라도 그토록 준비하는 마음가짐 덕이 컸을 것이라 짐작한다.
 
결혼 날짜를 받아놓고 예단이며 혼수 이야기가 나올 무렵이었다. 아내가 처녀 시절 직장생활 하며 들여놓은 정음사 판 ‘도스토옙스키 전집’이 무척 탐났다. 그래서 슬슬 구슬렸다. “부모님 모시고 살 테니 혼수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도 씨 선생의 전집이나 챙겨 오라”고.
 
당시만 해도 말 잘 듣던 아내는 8권짜리 전집을 가져 왔는데 막상 보니 한 권이 비었다. 친구가 『악령』을 빌려 가서는 돌려주지 않더라나. 책이라면 결벽증 비슷한 것이 있으니 이 빠진 전집을 어찌 참고 보겠는가. 아내가 그 친구를 만나러 갈 때마다 돌려 달라 독촉하라고 지청구를 해댔다. 서로 만나기도 쉽지 않고 그 친구도 이사 다니고 잊어버리고 하는 통에 결국 결혼 10년 만에 책을 돌려받던 날은 어찌나 기쁘던지.
 
『악령』,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열린책들. 아내의 친구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은 『악령』. 결국 결혼 10년 만에 돌려받았다.

『악령』,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열린책들. 아내의 친구가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은 『악령』. 결국 결혼 10년 만에 돌려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전집이 집이 아니라 어느 출판사 사장실 서가에 있다. 10년 전쯤이던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그 출판사 사장을 만나 우연히 그 전집에 얽힌 이야기를 했더니 마침 자기가 참고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그 전집을 구하던 참이라며 욕심을 내는 것이었다. 그래 결국 그 출판사에서 새로 낸 도스토옙스키 전집과 맞바꿔버린 것이다.
 
책을 바꾸던 날 8권 주고 20권이나 되는 책을 가져왔다고 희희낙락하는 남편을 보며 아내는 공연히 자리만 늘렸다고 투덜댔다. 자신의 ‘혼수’를 덜커덕 바꿔먹은 사실은 언급도 않는 아내에게선 세월에 깎여나간 문학소녀의 모습이 보여 기분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던 아내도 세월을 이기진 못하긴 하는 모양이다. 막내아들의 중학 시절 혼내다가 분을 못 이겨 사전을 냅다 던진 뒤로는 “우리 엄마한테는 사전이 무기야”란 아이들 놀림에 얼굴을 붉힌 일도 있다.
 
하지만 아내는 지금도 씩씩하다. 자신이 동네 아파트에서 함께 어울리는 아줌마 중에 책을 가장 많이 읽는다고 큰소릴 치기도 하고, 신문 등에 필자가 페미니즘에 기운 글을 쓰기라도 하면 ‘이중인격자’라 목청을 높이며 자기도 필자의 참모습을 까발리는 글을 SNS에라도 올려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이러구러 함께 아옹다옹 늙어간다. 이런 게 책에 나오는 고담준론보다 나은, 사람 냄새 나는 생활이라 여기며.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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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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