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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 면제'…선심성 퍼주기 vs. 지역 균형발전 드라이브 논란

중앙일보 2019.01.27 18:42
29일 정부의 예비 타당성 조사(예타) 면제 대상 사업 선정 발표를 앞두고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지역 표심을 노린 ‘선심성 퍼주기’라는 주장과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경제 드라이브’라는 반론이 팽팽하게 맞선다.
 
논란에 불을 붙인 건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10일 신년 기자 회견과 지난 24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 등에서 광역 단체별로 예타를 면제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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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타 조사는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공사의 경제성ㆍ효율성과 재원조달 방법 등을 따져 사업 추진이 적절한지 판단하는 절차다. 쉽게 말해 나랏돈이 많이 들어가는 사업을 해도 될지 말지 따져보는 '브레이크' 역할이다. 정부가 이 조사를 면제한다는 건 국민 혈세가 낭비되는 걸 막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건너뛰겠다는 의미다.
 
문제는 규모가 만만찮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에 17개 시ㆍ도 지자체가 예타 면제를 신청한 고속도로ㆍ내륙철도ㆍ공항ㆍ창업단지ㆍ국립병원 등 대규모 건설 공사는 33건으로 61조 2500억원에 달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4년~2018년) SOC 예타면제 사업 규모는 4조 7333억원(35건)인데, 이의 약 13배 규모다.
 
특히 경제적 타당성을 나타내는 비용대비 편익(B/C)이 1 이상 나오지 않는 사업들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혈세 낭비라는 지적이 나온다. 2016년 6월부터 예타를 진행했지만 B/C 분석이 낮게 나온 대구시의 산업선 철도, 지난해 1분기 예타에서 탈락한 강원도의 제천∼영월 고속도로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미 예타에서 탈락했거나 타당성 조사 대상으로도 거절된 사업도 많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예타 없이 추진한 사업 중 실패 사례로는 2009년 4대강 사업, 2010년 전남 영암 포뮬러원(F1) 건설 사업 등이 꼽힌다. 예타를 거친 사업도 막대한 적자를 유발하고 이용자가 적어 애물단지로 전락한 경우가 많다. 곳곳에 만들어놓고 적자를 면치 못하는 지방 공항이 대표적이다. 2012년 개통한 의정부경전철은 2017년 3600억 원대 누적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파산한 뒤 인천교통공사가 비상운영 관리를 맡고 있다.
무엇보다 일본식 ‘다람쥐 도로’를 양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이른바 ‘버블 붕괴’ 이후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도로ㆍ항만ㆍ공항 등 이미 포화된 SOC 건설에 들어갔다. 고속도로를 만들었지만, 사람은 안 다니고 다람쥐만 다닌다고 해서 ‘다람쥐 도로’라고 불렸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친정부 성향 시민단체까지 나서 ‘선심성 퍼주기’라는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실련은 27일 성명을 내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후 현재까지 29조원 규모 예타를 면제했다. 지자체별로 한 건씩만 예타 면제를 선정해도 최소 20조원, 최대 42조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이는 4대강 사업 등으로 60조원의 예타를 면제했던 이명박 정부 예타 면제 규모를 넘어서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김성달 경실련 국책사업감시팀장은 “토건 사업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지자체별 나눠 먹기’식 예타 면제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나경원 자유한국당 대표도 원내대책회의에서 예타 면제를 “총선용 선심 정책”이라고 규정했다. 내년 4월 총선, 가깝게는 설 연휴 민심을 겨냥한 정치적인 선심성 정책이란 비판이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캠페인 때부터 경기 부양을 위한 토목 건축사업은 벌이지 않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가 SOC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토건 국가’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에도 예타 면제라는 특단의 카드를 꺼낸 것은 정부 최대 과제인 일자리 창출을 위해 지역경제 활력 제고가 중요하다는 판단이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정부 방침대로 지자체가 신청한 사업 가운데 절반이 예타를 면제받아 조기 착공한다면 지역에 풀리는 돈은 20조~30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완성되면 외부 관광객을 유치할 수도 있다.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만한 호재가 없다. 각 지역이 건설과 토건 사업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썩이는 이유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SOC는 일회성인 정부의 단기 일자리 대책보다는 파급 효과가 크다”라며 “적어도 지금처럼 고용 침체와 경기 부진이라는 급한 불을 끄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균형 발전을 위해 예타 면제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연섭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현행 예타에선 서울처럼 인구가 많은 곳은 비용 대비 편익이 높게 나오고, 인구가 적은 지방은 ‘경제성이 없다’는 식의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예타가 지역 간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어 배점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타를 KDI가 전담하다 보니 조사 기간만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적체도 심각하다. 강승필 서울과학기술대 철도전문대학원 교수는 “수요 예측 등은 분야별 국책 전문 연구기관에 용역을 주고 KDI는 매뉴얼대로 평가가 이뤄졌는지 사후관리만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선물 주듯 지자체별로 1건씩 예타를 면제하는 방식은 자칫 절차상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한꺼번에 SOC 사업을 진행하면서 재정 건전성 훼손도 우려된다. 특히 탈락한 쪽에서 특혜ㆍ역차별을 운운하는 정치적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KDI 출신인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예타는 헐렁한 공공투자사업을 추진하려는 지자체나 정치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 혹은 적어도 눈엣가시가 돼왔고, 반대로 국민의 세금을 아끼는 역할은 많이 해 왔다”며 "예타는 경제성 평가와 사회적 편익 추정을 동시에 진행하는데 이를 무시하겠다는 정치적 발언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예비타당성 조사
총 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 재정지원이 300억원 이상 들어가는 대형 신규 SOC 사업의 정책 의의, 경제성을 KDI가 사전에 면밀히 검증해 사업 추진 여부를 판단하는 제도다. 예산 낭비를 방지하는 목적에서 1999년 도입됐다. 구체적 평가항목은 ▶건설에 필요한 비용과 건설 후 발생하는 편익 중 어떤 게 더 큰지(경제성) ▶사업을 꾸준히 추진할 수 있는지(정책적 분석) ▶지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지(지역 균형발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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