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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문막 땅 인수가 올린 이 한마디

중앙일보 2019.01.27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21)
눈은 아름답고 개들은 평화롭다. [사진 권대욱]

눈은 아름답고 개들은 평화롭다. [사진 권대욱]

 
눈이 온다. 바람도 제법 있다. 독서당 창 너머로 한 송이 두 송이 떨어지다 어느덧 온 허공을 하얀 꽃잎으로 가득 채우며 춤추듯 흩날리는 눈! 방안은 따뜻하고 개들은 평화롭다. 산막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처럼 아름답고 조용한 날이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S 선생. 미술을 전공하고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10수 년 전 기천문의 도반으로 만나 같이 집 짓고 가꾸며 살다가 남편 따라 지방으로 이주했다. 문막 산중 도장의 기둥에 새긴 조각이며 그림들, 분당 도장에서의 새벽 수련, 부안에서의 바지락죽…. 그녀와의 인연은 이렇듯 깊었다.
 
수년 전 그녀가 지방으로 직장을 옮긴 후 문막의 오두막과 땅을 처분했으면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도반 중 어떤 분이 인수코자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나 역시 인수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렇게 또 몇 해가 흘렀다.
 
싱겁게 끝난 S 선생과의 문막 땅 인수 협상
그러던 어느 날이던가, 문득 인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선생 부군의 정치입문 실패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긴 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꼭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왠지 그것을 인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의 생각도 같았다. 서로 인수, 인도할 의사가 있으니 값만 맞으면 되는 일.
 
쉬울 것 같은 데 그렇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라면 중개인을 넣든가 흥정을 할 일이지만 명색이 도(道) 공부를 한다는 사람끼리 세속적인 거래를 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러기가 싫었다. 투입원가, 청산가격, 교환가격, 대체가격 등 소위 물건값을 매기는 경제학적 이론을 총동원하고 정황 조건까지 고려한 인수가격을 정한 후 전화를 했다. “선생님. 문막 집과 땅 제가 인수하겠습니다.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한참 말이 없던 그녀가 말했다.
 
S 선생의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이 한마디에 나는 인수가격을 상당히 올려야 했다. 진정한 고수는 그녀였다. [사진 권대욱]

S 선생의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이 한마디에 나는 인수가격을 상당히 올려야 했다. 진정한 고수는 그녀였다. [사진 권대욱]

 
“권 사장님 알아서 주시지요.”
“그럼 제가 드리는 대로 받으십시오.”
“네. 그런데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이것이 우리가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나눈 대화의 전부다. 이후 나는 내가 생각하는 값을 적절한 시차로 지불했고 거래는 끝났다. S 선생의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라는 이 한마디에 나는 나의 인수가격을 상당히 올려야 했다. 진정한 고수는 그녀였고 나는 하수였다. 무수(無手)가 상수(上手)이다. 
 
몇 해 전 집 거래를 하던 중 부동산중개료 이야기가 나와 중개인에게 말했다. “복비는 내가 주는 대로 받으시지요.” 중개인은 별 미친놈 다 보았다는 듯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한대로 주셔야 합니다.” 단연코 말하거니와 나는 절대로 그가 말한 가격을 주지 않았다. 산막의 집과 땅을 만일 그녀가 다시 사고 싶다 말할 때 나도 “선생님,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못할 것 같다"가 솔직한 대답이다. 내가 영원히 하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욕심 가득 채우려만 할 뿐 비우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가.
 
내가 글 쓰는 이유
아름다운 몰입의 과정 '글쓰기' [사진 권대욱]

아름다운 몰입의 과정 '글쓰기' [사진 권대욱]

 
오늘 눈 덮인 산막에 앉아 지난 글들을 살펴보니 山幕(산막), 자연, 휴넷, 청단, 조찬 강의, 論語(논어), 孟子(맹자), 홀아비 밥 먹는 이야기, 幸福(행복), 名譽(명예), 中庸(중용), 君子(군자), 饜足之道(염족지도), 大丈夫(대장부), 주인 되는 삶, 걷기, 신변잡사 등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내 자랑과 섞어 잘 엮었더라.
 
비록 글은 쓰는 사람의 현실이 아니라 그 사람이 생각하고 꿈꾸는 이상의 표현이라 하지만 언행일치(言行一致), 눌언민행(訥言敏行)의 교훈을 생각하면 많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런데도 왜 글을 쓰느냐 묻는다면, ① 생각하고 그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어서, ② 기록하기 위해서, ③ 뒤돌아보고 고치며 자신의 이상을 표현하고 싶어서, ④ 유명해 지고 싶어서라 할 터이고. 그래도 또 자꾸자꾸 물어 대답 궁해지면 그땐 그냥 “글 쓰는 것이 좋기 때문”이라 대답할 터인데.
 
그마저 못마땅해 “왜 글 쓰는 것이 좋으냐”고 굳이 따져 묻는다면 이유는 많다. 첫째, 몰입할 수 있고 몰입의 과정 또한 좋고 즐겁다. 둘째, 내 경험과 지식에 바탕 한 사유의 산물이 보석과도 같고 어느 누가 두드리고 부수려 해도 절대 깨어지지 않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이다. 셋째, 그 보석들을 언제든 꺼내 볼 수 있고 나눌 수 있고 아무리 꺼내 쓰고 나누어도 절대 줄지 않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만일 이러함에도 굳이 글 쓰는 이유를 또 묻는다면 “그냥 웃고 말지요” 했다는 시인의 대답을 인용할 밖엔 자신이 없다. 이런 연유로 나는 글을 써왔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특히 오늘같이 세모를 앞둔 쓸쓸한 밤에는 孔子(공자), 孟子(맹자), 幸福(행복), 經營(경영), 일, 大丈夫(대장부) 뭐 그런 것들 말고 슬프고 아련하고 눈물 나고 가슴 먹먹해지는 이야기를 꼭 올리고 싶다.
 
그리하여 나도 독자도 덕지덕지 엉겨 붙은 지난 세월의 한과 슬픔을 지고지순의 슬픔에 녹여 마음 가득 찌든 때를 깨끗이 벗겨내는 엄중한 의식을 치르고 싶다.
 
허무를 달래는 길, 장작 패기
허무를 달래는 길 '장작 패기' [사진 권대욱]

허무를 달래는 길 '장작 패기' [사진 권대욱]

 
공(空)과 허(虛), 무(無)를 달래고 기운을 보충하는 방법의 하나는 미결 상태의 일을 팍팍 처리해 나가는 거다. 간결하게 과단성 있게 하나하나 망설이지 않고 말이다. 언젠간 해야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일은 모두 마음의 짐이 되어 기운을 고갈시킨다. 요청받은 원고도 그 한 가지요, 산막 등기 연하장 쓰기도 마찬가지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장작 패기, 잔디 깎기, 나무 자르기 등 성과가 눈에 보이는 일들이 좋다. 찬바람 맞으며 걷는 것도 좋다. 그도 저도 다 안 되면 어쩌나 그땐 허하고 공하고 무한 것들이 제풀에 겨워 나가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별도리가 없을 듯하다. 인내와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게 싫다면 무엇이든 해보라. 세상에 공짜는 없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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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욱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필진

[권대욱의 산막일기] 45년 차 직장인이자 32년 차 사장이니 직업이 사장인 셈이다. 일밖에 모르던 치열한 워커홀릭의 시간을 보내다 '이건 아니지' 싶어 일과 삶의 조화도 추구해 봤지만 결국 일과 삶은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애써 구분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삶 속에 일이 있고 일속에 삶이 있는 무경계의 삶을 지향하며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문막 산골에 산막을 지어 전원생활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60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귀중한 삶과 행복의 교훈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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