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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폭탄 3용사'는 거짓···75년만에 밝혀진 군국의 진실

중앙일보 2019.01.27 06:00
Focus 인사이드 - 남도현 
 
야스쿠니 신사 석등에 새겨진 선전 조형물. 지금도 수시로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해 문제를 일으키는 장소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군국주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https://sonshi.xyz/wiki]

야스쿠니 신사 석등에 새겨진 선전 조형물. 지금도 수시로 일본 정치인들이 참배해 문제를 일으키는 장소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군국주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https://sonshi.xyz/wiki]

 

75년 지나 밝혀진 군국주의 진실
일본군 '폭탄'들고 뛰어들어 전사
전국에서 성금, 영웅 만들기 열풍
'역사 왜곡' 일본은 달라졌을까

1932년 1월 28일, 일본이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차지였던 상하이에 군대를 전격 상륙시켰다. 중국군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른바 제1차 상하이 사변인데, 이는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을 수립하는 동안 여타 열강들의 이목을 상하이로 끌기 위한 일종의 ‘성동격서’ 작전이다.
 
상하이 도시 외곽에서 돌파를 시도한 일본군은 중국군 저항에 막혀 애를 먹었다. 한 달여 만인 2월 22일 간신히 목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천신만고 끝에 거둔 승전이다.
 
승전의 여파는 일본 본토에서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이 2월 24일 “폭탄을 두른 3명의 병사가 돌격로를 개척하기 위해 적진으로 용감히 달려들어 철조망을 폭파한 후 산화했다”고 보도해서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온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해당 기사 [사진 wikimedia]

엄청난 반향을 불러 온 오사카 아사히신문의 해당 기사 [사진 wikimedia]

 
이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을 비롯한 다른 매체들도 이를 인용해 후속 보도했다. 단지 전선의 동정을 알리는 정도였지만 파장은 예측을 벗어났다. 이들 병사 3명이 자원해 용감히 싸우다 산화했다는 소식에 독자 반응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18공병대대 소속 에시타 타케지(江下武二)를 비롯한 세 명의 전사자들은 순식간에 모든 일본인 관심사에 올랐다. 물론 침략 전쟁 중이던 당시 일본에서 전사자 발생은 흔한 일상이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너무 장렬하다며 연일 칭송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뜨거운 반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국 단위로 유가족을 돕기 위한 행사가 열려 6만 5000엔이 모금됐다. 1930년대 초 일본 노동자 월평균 급여가 50엔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거금이다. 월평균 급여를 200만 원으로 가정한다면 26억 원이 성금으로 모였다는 얘기다. 
 
세이쇼우지에 세워진 동상. 군국주의 시절 강제로 참배하는 장소가 됐다. [사진 wikimedia]

세이쇼우지에 세워진 동상. 군국주의 시절 강제로 참배하는 장소가 됐다. [사진 wikimedia]

 
일본 정부도 전사자 3명을 ‘폭탄 3 용사(爆彈三勇士)’로 이름 붙여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도구로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추모곡과 영화를 만들어 강제적으로 듣고 보게 했다. 선전 책자를 학교에 배포해 시험 문제로 출제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전사자 3인을 신격화하려고 도쿄 인근 사찰인 세이쇼우지(靑松寺)에 동상을 세우기까지 했다. 결국 많은 사람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참배해야 했다.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뒤 전황이 나빠지자 일본 군부는 ‘폭탄 3 용사를 본받아 천황과 제국을 위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치자’며 선전 강도를 높였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는 아베 총리 [중앙포토]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는 아베 총리 [중앙포토]

 
사실 일본에서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의 뤼순 전투 이후 병사들을 무모하게 소모한 사례는 많았다. 그러나 폭탄 3 용사는 자살 특공대 ‘가미카제’ㆍ인해전술 ‘반자이 돌격’ㆍ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을 가진 ‘옥쇄’와 같은 무서운 광기의 시발점이 됐다. 한마디로 국민의 생명을 우습게 알았던 어처구니없던 시대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폭탄 3 용사’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다. 이들이 전사한 것은 맞지만, 스스로 임무에 뛰어들어 산화하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투입된 다른 부대원과 같은 처지였다. 오히려 목표 지점에 늦게 도착해 뜻하지 않게 폭사했다. 목표지점에 제때 도착했던 군인은 모두 무사했다. 물론 폭사했던 그들의 죽음을 헐뜯을 수는 없지만 알려진 소식은 왜곡됐다. 전사자가 나왔던 해당 부대도 처음에는 “작전 중 일부 희생이 있었다”는 정도로 브리핑했을 뿐이었다.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지난해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옛일본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지난해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옛일본군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평범했던 전투 성과는 어떤 이유로 미화될 수 있었을까, 특종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됐던 기자 때문이다. 취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승전 소식에 도취 돼 기사를 내면서 소설을 쓰듯 미화해서다.
 
왜곡된 내용을 정정해야 했다. 그런데 기사가 나간 뒤 독자 반응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커졌다. 바로 잡을 수 없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허구로 부풀려지고 조작된 소식이지만, 일본 정부가 나서 선전 수단으로 이용했다. 한마디로 얼떨결에 만들어진 영웅을 군국주의자들이 철저하게 이용한 협잡이었다.
 
일본 방위성은 지난 20일 동해상에서 발생한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P-1 초계기의 레이더 겨냥 논란과 관련해 P-1 초계기가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지난해 12월 28일 공개했다. [일본 방위성 유튜브 캡처]

일본 방위성은 지난 20일 동해상에서 발생한 우리 해군 광개토대왕함과 일본 P-1 초계기의 레이더 겨냥 논란과 관련해 P-1 초계기가 촬영한 동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지난해 12월 28일 공개했다. [일본 방위성 유튜브 캡처]

 
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묻을 수는 없었다. 지난 2007년 6월 13일, 아사히신문은 그들의 잘못을 꺼내 알리고 용서를 빌었다. 무려 75년이 지난 뒤 나온 고백이다.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진실 고백에 나섰다. 그동안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기에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는 달라졌을까. 그러나 일본은 최근 과거사 반성을 거부하고 군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군국주의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있다.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군사칼럼니스트 남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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