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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국민연금 무서워 투자하겠나

중앙일보 2019.01.25 00:26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 얘기를 할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사실과 다르거나 거두절미, 시장을 공포에 떨게 하는 발언을 불쑥 꺼낼 때가 잦다. 의도가 뭔지, 알고 하는 얘기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번 스튜어드(steward)십 코드 발언이 딱 그렇다. 대통령은 23일 “대기업 대주주의 위·탈법에 대해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할 것”이라며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스튜어드십이 무슨 범죄인 처벌 수단이라도 되는가. 이 말은 적어도 다섯 가지 이유에서 잘못됐다.
 

국민연금 동원했다 옥살이
박능후, 문형표를 기억하라

첫째, 스튜어드십 코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2010년 영국에서 시작된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1990년대 행동주의 펀드가 극성을 부리면서 기업이 허약해졌다. 단기 수익에만 급급해 알짜 자산 매각,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를 부추긴 탓이다. 주가는 올랐지만 연구·개발 투자가 줄어 혁신을 잃었다. 이에 맞서 탄생한 스튜어드십은 ‘충실한 집사처럼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게 임무다. 국민연금의 주인은 2200만 수익자다. 아무리 ‘정의’란 이름으로 포장한들 기업 벌주기는 집사의 일이 아니요, 주인을 위한 일도 아니다. 대기업 대주주 범죄가 문제라면, 검찰·경찰, 국세청·공정거래위원회·금융위원회가 단죄하면 될 일이다. 하고많은 국가기관 다 놔두고 왜 국민연금인가. 그러니 재계가 “처벌이 아니라 기업 탈취가 목적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 시기가 나쁘다. 대통령이 발언한 날은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열리던 중이었다. 안건은 대한항공에 대한 주주권 행사. 위원들은 갑론을박했지만, 적극적 주주권 행사는 반대했다. 보건복지부는 이달 말쯤 기금운용위원회를 열어 주주권 행사 여부를 확정한다. 원칙대로면 수탁자위원회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콕 찍어 말을 하면서 상황이 꼬였다. 복지부는 벌써 난감해하고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 개편안도 대통령 말 한마디에 확 뒤집었던 복지부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안 일어난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셋째, 특정 행동주의 펀드를 도와준 꼴이 됐다. 마침 강성부 펀드가 대한항공을 정조준하는 중이다. 조양호 회장 퇴진과 자산매각 등을 요구했고, 거절하면 의결권 싸움도 불사하겠다고 했다. 경영 부실을 이유로 들었지만, 대한항공의 경영 지표는 아시아나보다 월등히 좋다. A 자산운용사 사장은 “대한항공이 (아시아나보다) 먹을 것도 많은 데다, 국민연금의 지원사격도 기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이런 논란을 의식해 “사회 활동하는 곳과 국민연금이 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잘랐는데, 대통령의 말로 입장이 곤란해졌다.
 
넷째, 내로남불 비판을 자초했다. 지난 정부의 문형표 국민연금 이사장은 삼성을 공격한 ‘악당 펀드’ 엘리엇에 맞서 국민연금을 동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살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청와대 참모에게 “합병 안건에 대한 국민연금 의결권 행사 문제를 잘 챙겨보라”고 지시한 게 죄가 돼 감옥살이 중이다. “국민연금을 동원해 악덕 기업을 혼내주라”는 지시는 이것과 뭐가 다른가.
 
다섯째,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킨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에 공격당한 기업은 첫해 4.8%, 이듬해 18.1%의 고용이 줄었다. 투자는 첫해 2.4%, 이듬해 23.8%가 줄었다. 자사주 매입도 20.3%나 늘었다. 경영권 방어에 그만큼 돈이 든다는 얘기다. 재계가 어제 “맘껏 투자하라”던 대통령이 오늘 “경영권 조심하라고 뒤통수를 때렸다”고 당혹해 하는 이유다. 그러니 경제를 모르는 대통령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하기야 대통령 탓만 할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이런 소리를 듣게 한 청와대 경제 참모들부터 직무유기죄로 다스려야 한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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