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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반도체, 무서운 건 중국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9.01.24 00:17 종합 30면 지면보기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이제부터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 문재인 대통령이 반도체 경기 후퇴를 걱정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렇게 답했다. 이 말에 반도체 산업의 특징이 그대로 함축돼 있다. 불황기에 오히려 투자를 늘리고, 이렇게 쌓은 경쟁력으로 상대를 제압해버리는 것. 초격차를 유지하는 선도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실력 행사’다.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 이상 조짐
‘산업 외 논리’로 허송할 시간 없다

경기 사이클이 뚜렷한 반도체 산업은 무자비한 치킨 게임의 현장이다. 침체와 부활 과정이 그만큼 극적이다. 1980년대 중반 삼성전자가 64KD램 개발에 성공했을 때, 미·일 업체의 덤핑으로 D램 가격이 10분의 1로 폭락했다. 이때 삼성전자의 선택은 반도체 라인 증설이었다. 그 결단이 없었다면 세계 1위 삼성전자 반도체는 없었다. 최악의 반도체 불황기였던 2002년,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하이닉스는 미국 마이크론에 팔리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하이닉스 이사회는 독자 생존을 선택했다. ‘마지막 생명줄을 포기했다’는 미국 경제지의 비아냥까지 무릅쓰고서였다. 그때 포기했으면 10년 뒤 SK와 결합도, 오늘날 세계 3위 SK하이닉스 반도체도 없었다. 이런 치킨 게임 과정에서 독일 키몬다, 일본 엘피다 같은 세계적 업체가 스러졌다.
 
머지않아 반도체 강국 한국이 이런 치킨 게임에 거꾸로 당할지 모른다.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들여 반도체 굴기(崛起)에 나서는 중국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통상 규제가 우리 반도체에 시간을 벌어주고 있지만, 그 시간이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뒷짐만 지고 있던 우리 정부가 오랜만에 움직였다. 1조6000억원을 들여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그것이다. SK하이닉스가 10년간 12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혀 더욱 관심이 커졌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 전국 지자체 간의 치열한 유치 경쟁 때문이다. 용인·이천·청주·구미가 저마다의 연고와 장점, 필요성을 내세우며 뛰어들었다. 뒤늦게 충남까지 나서 5파전 양상이다. 청와대에 입성한 지역 출신 정치인 이름까지 슬쩍 들먹이며 분위기를 띄우는 곳도 있다.
 
정부 내에선 벌써 이상 조짐이 느껴진다. 당초 반도체 인프라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곳을 염두에 뒀던 산업부는 지금은 말을 아끼는 분위기다. 경제 논리 대신 정치 논리가 판을 친 대형 국책 사업의 악몽이 벌써부터 떠오른다.
 
초조함은 기업의 몫이다. SK하이닉스는 유치전을 벌이는 지자체들을 상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눈치까지 봐야 할 판이다. 오롯이 산업 경쟁력이라는 잣대로 가늠할 문제에 자칫 엉뚱한 논리가 작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산업 인프라 활용, 협력업체와 상생, 우수 인재 유치 등을 생각해서 내심 선호하는 지역이 있지만, 입조심만 하고 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시간이다. 당초 계획대로 1분기 중 클러스터 입지가 결정되더라도 각종 인허가 절차 등을 거치고 나면 빨라도 2021년에나 착공할 수 있다. 지금 짓고 있는 이천의 M16 라인은 2020년 완공된다. 입지 결정이 늦어지면 그만큼 빈 시간이 늘어난다. 그 사이에 반도체 산업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가장 바짝 따라붙은 반도체 기술에서도 한국과 1년의 격차가 있다고 보고 있다. 반도체처럼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산업에서 1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중국에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이라는 업계의 자신감도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시간을 허송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쫓아오는 중국이 무서운 게 아니다. 우물쭈물하는 우리의 시간이 더 무섭다. 
 
이현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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