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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하지않는 즐거움, 퀸스타운에선 누구나 여왕

중앙일보 2019.01.23 11: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15)
숙소에서 내려다 본 퀸스타운 전경. 바쁘게 할 것과 즐길 것이 많은 곳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여행, 느긋하게 바라보거나 걷는 여행지로도 추천한다. [사진 박재희]

숙소에서 내려다 본 퀸스타운 전경. 바쁘게 할 것과 즐길 것이 많은 곳이지만 움직이지 않는 여행, 느긋하게 바라보거나 걷는 여행지로도 추천한다. [사진 박재희]

 
“시력이 좋으면 빙하와 해변 펭귄도 보일 겁니다. 잘 찾아보세요.”
착륙이 가까워지자, 기장은 노래하듯 안내 방송을 한다. 진담으로 들릴 만큼 청명한 하늘 아래 산이 푸르르다. 만년설은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스코티쉬 블룸이라는 노란 꽃으로 덮인 야트막한 언덕이 어깨처럼 감싼 비행장. 퀸스타운 비행장은 작고 다정하다.
 
넓은 마당 크기(세계의 부호 중 분명히 퀸스타운 공항보다 큰 개인 활주로를 가진 사람이 있다!에 소중한 1000원을 건다.) 활주로에 내린 트랩 앞에 서서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한 번의 호흡을 경험했다. 바스락거리는 빛. 숨을 쉬는 순간 머리가 환해졌다. 공기는 ‘맑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환한 빛의 기체를 들숨으로 마시는 느낌. 기습적인 화사함이 몰려왔다.
 
여행을 마친 후 우리도 누구나 한다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 이를테면 ‘최고의 순간’ ‘제일 좋았던 코스’ 등을 얘기한 적이 있다. “난생처음 공기가 ‘환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너무 어색했지요. 공기가 빛이라니! 빛의 나라가 있다면 이럴까 싶고 신기하더군요.” 캡틴은 그날 나만 살짝 4차원으로 다녀온 것이 아니라고 증명해줬다. 그는 신기하게도 나와 똑같이 바로 그 순간을 꼽았다.
 
우리가 치르는 값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우리가 기대한 방식으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퀸스타운에 도착한 날, 마술처럼 숨을 쉴 때마다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은 생각해보면 끈끈하게 몸에 들러 붙어있던 피로감 덕분이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한숨 한숨 밝은 빛이 들어와 몸은 한 눈금 한 눈금씩 밝아졌다.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가 그대로 방향 전환을 하기 힘들 듯 우리는 여행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여정을 가졌다. [사진 박재희]

시속 100km로 달리던 자동차가 그대로 방향 전환을 하기 힘들 듯 우리는 여행 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여정을 가졌다. [사진 박재희]

 
일상의 과제로부터 도망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가도 막상 떠나면 숙제에 몰리듯 살던 버릇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밀린 숙제, 할 일을 해치우듯 여행을 완수하고 돌아와 허무했던 기억이 적지 않다. 시속 100km로 달리는 상태 그대로 방향을 바꾸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우리는 숨을 고르고 일단 속도를 줄여야 했다. 슬로우 슬로우 슬슬~ 속도를 늦춰 새로운 박자와 방향을 잡아야 할 우리에게 퀸스타운은 완벽한 베이스 캠프였다.
 
우리는 상상하던 그림의 일부가 되어 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풍경이 되고 게으르게 호수 주변을 걷다가 맥주 브루어리를 오갔다. 숙소에서 낮잠을 즐기다가 공원 잔디에 누워 다시 잠이 들기도 깨기도 했고 사람을 구경나온 새들과 눈을 맞췄다.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뜀박질 무리에 섞여서 우리는 늘 숨이 차다. 아무리 뛰어봐도 항상 내 앞에는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이 높고도 노랗게 보이던 날, 더 빨리 뛰는 대신 달리기를 멈출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자기만의 속도를 찾기 위해서 일단 비어있는 시간에 놓여야 했나 보다. 제일 먼저 스마트폰을 껐고 음악도 듣지 않았으며 심지어 책도 읽지 않았다. 우리는 그다지 얘기도 나누지 않은 것 같다.
 
누구는 여행이 일종의 가출이라고 했다. 새로운 모든 것을 작정하고 떠나왔지만 정작 우리를 매혹한 것은 텅 빈 시간이었다.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비어있는 시간이란 의외로 너무나 감격스럽다. 차곡차곡 초록빛 에너지가 채워지고 있었다. 여왕에게나 어울릴 만큼 아름다워서 ‘Queenstow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더니 과연 이곳에서는 여왕 마마처럼 느리게 걷게 된다.
 
퀸스타운 한가운데 호수가 있다. 퀸스타운은 액티비티 투어가 유명한 곳이지만 번잡스럽지 않은 모래사장을 산책해보는 것도 좋다. [사진 박재희]

퀸스타운 한가운데 호수가 있다. 퀸스타운은 액티비티 투어가 유명한 곳이지만 번잡스럽지 않은 모래사장을 산책해보는 것도 좋다. [사진 박재희]

 
비췻빛 와카티푸 호수가 도시 한가운데 있는, 도시 자체가 정원인 곳에서 걷는다는 것은 속도나 이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걸음은 다만 ‘보고 숨 쉬고 머물며 흡수하기 위한 정적인 행위’였다. 우리는 느리게 걸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세례를 받았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는 인류애적 사랑과 지구 평화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이 흔치 않다고 믿는다. ‘맛있게 잘 먹기’에 대한 집념이 강한 우리는 누룽지와 마른 빵으로 버텨야 할 날을 미리 보상하고자 열심히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덕분에 퀸스타운은 말도 안 되게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약속의 땅임을 알아냈다. 퀸스타운을 떠나며 이제껏 남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별로 못하고 살았으니 검증한 맛집을 알리는 덕이라도 쌓아야겠다. 먹기는 일차적으로는 혀와 눈을 만족하게 하고 이내 우리 몸을 두껍게 할 것이나 결국엔 마음을, 모르는 사이에 정신도 살찌워준다고 믿어보자.
 
퀸스타운은 오래된 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룬다. 무심히 걸어보는 하루를 일정에 넣어본다. [사진 박재희]

퀸스타운은 오래된 것과 새것이 조화를 이룬다. 무심히 걸어보는 하루를 일정에 넣어본다. [사진 박재희]

 
애기스 쉑(Aggy’s Shack)
퀸스타운 시내의 호숫가에 있는 일명 텐트 음식점이다. 여기서 처음 피시앤칩스를 먹은 날, 중독을 예감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아침, 점심, 간식으로도 먹었다. 흔한 메뉴고 특별한 소스도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맛있는지!
 
한번은 칭찬 삼아 주인에게 비결을 물었다. (맛있다고 감탄하면 좀 더 큰 걸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글쎄…매연 때문일까? 지나가는 자동차 매연이 섞이잖아. ㅋㅋㅋ” 주인의 대답에 따르면 퀸스타운의 매연 맛은 일품이다.
 
퍼그버거(Fergburger)
2000년에 문을 연 퍼그버거(Fergburger)에서는 두 손으로 잡기도 힘들 만큼 커다란 버거를 판다. 오래전 유럽을 가난하게 여행하면서 매 끼니를 맥땡땡땡으로 연명한 이후 내게 햄버거란 울렁울렁~ 뱃멀미나 진배없다. 게다가 퍼그버거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이 길었다.
 
“아무리 맛있어도 저렇게 줄을 서서 먹는다니. 좋은 생각이 아니야” 우리는 서로서로 최면을 걸었다. 최면은 아무나 걸 수 있는 게 아닌지 퀸스타운을 떠나기 전 우리는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했다. 평소에 비하면 줄이 짧았는데 그날 기다려서 먹기까지 1시간이 걸렸다.
 
결과는? 내게 퍼그버거 사진을 보여주시라. 당장 파블로프의 개 실험 반응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는 아직도 퍼그버그를 먹으며 찍은 영상을 우울할 때, 기운 빠질 때 그리고 다시 리셋이 필요할 때 돌려보기를 한다. 햄버거가 폼 잡고 들려주는 진지한 충고나 위로보다 훨씬 효과적이다.
 
미슐랭 스타 셰프의 음식점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싸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 그 이외에 모든 것은 배제한 식당. 퀸스타운에 가면 반드시 다시 가고픈 음식점이다. [사진 박재희]

미슐랭 스타 셰프의 음식점이라고 해서 반드시 비싸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 그 이외에 모든 것은 배제한 식당. 퀸스타운에 가면 반드시 다시 가고픈 음식점이다. [사진 박재희]

 
라타(Rata)
퀸스타운 마지막 기념 만찬을 할 장소를 정하는 일은 ‘난이도 최상’이었다. 원정대에는 채식주의자, 해산물 파, 고기 파, 생선 기피자 게다가 특정 해산물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까지 있다. 정말 가지가지들 하는 사람들이라 식당을 예약하는 일은 국회에서 법안 상정을 두고 여야 합의를 이루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러다가 찾아낸 음식점이 라타(Rata)다.
 
예약하고 보니 이름난 집이었지만 그런 식당이 오히려 위험 변수가 큰 법. 유명이 허명이던 식당에서 돈만 아까웠던 경험도 많기에 별 기대 없이 식당에 들어섰다. 내부장식이 극도로 단순한, 한마디로 장식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거의 없는 식당이었다. 요즘 말로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명품식기 사용료가 빠진 요리가격은 선량했다.
 
7명이 전채 요리, 주요리, 디저트를 포함 대략 20가지의 메뉴를 섭렵했다. 주술에 걸린 사람들처럼 음식을 먹는 우리 모습을 상상하고 싶다면 ‘빨간 머리 앤’을 떠올리면 된다. 앤이 태어나서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은 날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퀸스타운의 갈매기는 마치 사람을 구경하듯 피하지 않았다. 다가와 눈을 맞추는 녀석도 있다. [사진 박재희]

퀸스타운의 갈매기는 마치 사람을 구경하듯 피하지 않았다. 다가와 눈을 맞추는 녀석도 있다. [사진 박재희]

 
먹는 행위란 때로 방언하게 한다. 모든 것이 맛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잉여가 없는 음식점에서 맛난 식사를 한 끼니 한 후 난 새삼 깨달았다. ‘스스로 위대한 것들은 단순하며 요란하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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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필진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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