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추억의 고속버스 동물들…동부고속 노루, 광주고속은?

중앙일보 2019.01.21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13)
어린 시절부터 고속버스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요즘도 고속버스를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사진 박헌정]

어린 시절부터 고속버스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늘을 나는 양탄자’ 같은 것이었다. 요즘도 고속버스를 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사진 박헌정]

 
어릴 때부터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해주던 고속버스, 아직도 고속버스를 타면 기분이 좋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바로 옆에 고속버스가 멈추어도, 내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여유롭게 항해하는 듯한 고속버스를 만나도 설렌다. 내게 고속버스는 ‘답답한 도시 탈출’의 아이콘이다.
 
그런데 예전의 고속버스 회사들 가운데 요즘 보이지 않는 회사도 있는 것 같아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이 분야 또한 곡절을 겪으며 몇몇 회사가 사라졌다. 그리고 깔끔한 버스와 예쁜 안내양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회사로 생각했던 유년시절 기억과 달리, 그냥 근근이 꾸려나가는 회사들이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전 동대문이나 서울역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에 오르면 왜 이리 출발하지 않고 부릉부릉 뜸을 들이던지…. 길어봐야 10~20분이었을 텐데 말이다. 머리 위 선반에는 할아버지께서 카스텔라 빵과 사이다가 든 가방을 올려놓으셨고 나는 ‘저걸 언제 달라고 할까?’ 출발 전부터 골똘히 생각했었다. 행복한 나들이였다.
 
광주고속이 안 보인지 한참 됐다고 생각했는데, 1994년부터 금호고속으로 이름을 바꿨다. 70년대에 이 광주고속에는 거북이가 그려져 있었다. ‘고속 주행’이 기본가치인 버스에 거북이 그림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고속버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거북이=안전’으로 이해해주었던 것 같다.
 
“일곱 빛깔 무지개를 등에다 업고 / 사랑과 행복을 실어 나르며 / 반겨주는 꽃 풍선에 보람을 안고 / 광주고속 거북이는 마냥 달린다.” 라는 사가(社歌)에서는 70년대 대한 뉴스의 흑백필름 속에서 활짝 웃음 짓는 승객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 15분 동안 재빨리 내려 호두과자 같은 간식을 사 먹는 것은 이제 맛을 떠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사진 박헌정]

휴게소에서 쉬는 시간 15분 동안 재빨리 내려 호두과자 같은 간식을 사 먹는 것은 이제 맛을 떠나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사진 박헌정]

 
이 회사는 코오롱고속과 충북지역을 운행하던 속리산고속을 인수했다. 속리산고속은 금호고속의 계열사가 되어 CI나 디자인은 금호고속의 빨간색을, 브랜드는 아직도 ‘속리산’을 사용한다. 충북지역 마케팅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동양고속은 2006년에 자기보다 더 큰 한진고속을 인수해서 업계 2위가 됐다, 어쩐지 ‘한진·중앙·광주’ 옛날의 트로이카 중 언제부턴가 한진이 잘 안 보인다 싶었다. 동양고속은 영남권 노선이 많다. 동양그룹과 같은 뿌리인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회사고 모기업은 동양건설산업이라고 한다.
 
동부고속은 이름처럼 강원도 쪽을 기반으로 출발했다. 동부그룹은 창업자가 강원도 삼척 출신이라 ‘동부’였다고. 이 회사는  2014년 매각돼 이제는 더는 동부그룹이 아니다.
 
대학교 4학년 때 동부그룹에 입사 지원을 했는데, 계열사 가운데 동부고속이 가장 친근하게 느껴져 1지망으로 쓰려고 했더니 대졸 신입사원은 아예 뽑지도 않는다고 해 포기했다. 한번은 동해시에서 서울로 올라올 때 영동고속도로가 막히니까 우회 국도로 요리조리 어찌나 잘 헤치고 오던지, 신뢰감이 생겼다. 버스에 그려진 이미지 동물이 노루였다.
 
미국 그레이하운드가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었다. 그레이하운드고속은 외부에 그려진 커다란 개 그림, 그리고 이층 버스라는 사실만으로도 모든 어린이의 선망 대상이었다. 너무나 타보고 싶었다. 특히 그 2층에. 오죽하면 내가 여섯 살 때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영어로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하고 인사한다는 게, ‘그레이하운드?’ 했다면서 웃었다. 안타깝게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채 그레이하운드는 1978년에 사라졌다. 사실 이층 버스가 아니라 뒷부분이 높은 2단형 버스였다.
 
 
그레이하운드를 인수한 것은 중앙고속이었다. 중앙고속은 재향군인회에서 설립했는데 이 회사의 사자 그림은 그레이하운드에 견줄 게 아니었다. 안성에 고모님 댁이 있는데, 시외버스 운전을 하시던 고모부께서 어느 날 중앙고속으로 스카우트 되어 주변의 자랑이 되었고 얼마 후 집안 살림도 피었다. 안성 터미널 근처에서는 고모부를 모두 알 정도다.
 
천일고속은 부산의 회사다. 1979년인가, 나의 시골인 충남 금산에 코오롱과 천일고속이 들어왔다. 빅 3도, 동양·한일도 아니고, 촌 동네를 홀대하느라고 가장 후진 회사를 배정했다며 서운해했는데, 그냥 내가 그 회사들을 몰랐던 것뿐이었다. 그해에 온 가족이 금산에 여행을 다녀오면서 가장 뒷자리에 우리 가족 다섯 명이 쪼르륵 나란히 앉아있으니 마치 콩깍지에 박힌 콩알 같다고 생각했다.
 
한일고속의 상징은 제비였다.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경부선 쪽을 주로 운행하고 요즘도 자주 타지만 별다른 추억은 없다. 삼화고속은 인천 회사로 홈페이지에 별다른 정보도 없고 신촌 쪽에서 워낙 많이 보여 별로 고속버스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어볼 때 속으로 뭘 말할까 고민하는데 어떤 아이가 앞에서 “운전사요!” 했다. 아, 아깝다! 내가 그걸 대답해야 했는데 선수를 뺏겼다. 그런데 선생님은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다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시대가 될 거예요”라고 해 우리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건 곧 희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버스를 몰고 쭉 뻗은 고속도로를 번개처럼 달리다니!! 아이들에게 꿈을 주던 고속버스였다.
 
박헌정 수필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