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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아들 - 조정구 딸 혼사 다루며 ‘고종 망명’ 물밑 추진

중앙선데이 2019.01.19 00:21 619호 17면 지면보기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③ 이종찬 임정기념관 건립위원장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중국 상해 공항에 모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꽃다발을 건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인다. 오른쪽에 눈물을 훔치는 이가 성재 이시영이고 백범 바로 앞 동그라미 속 소년이 이종찬이다. [사진 우당기념관]

1945년 해방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중국 상해 공항에 모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꽃다발을 건 백범 김구를 중심으로 그 왼쪽에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인다. 오른쪽에 눈물을 훔치는 이가 성재 이시영이고 백범 바로 앞 동그라미 속 소년이 이종찬이다. [사진 우당기념관]

2019년을 각별하게 맞이하는 이로 이종찬(83) 전 국정원장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 근현대사의 비하인드 스토리이자 그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잘 안 알려진 이야기가 존재한다.

신흥무관학교 세운 이회영 잠입
고종 최측근 조정구 부자와 접촉
‘독립운동 열기 재점화’ 망명 논의

눈치 챈 일제의 고종 독살로 무산
3·1운동 직전 온 가족 다시 중국행

 
이념 갈등이 심한 한국 사회에서 그는 특이한 이력의 삶을 살았다. 1980년 제5공화국과 민정당 창당의 주역으로 네 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그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은 것은 ‘DJP연합’만큼이나 파괴력이 큰 충격이었다. 그는 DJ정부에서 초대 국정원장(98년 3월~99년 1월)을 지낸 후 정계를 은퇴했다. 그 후 20년 동안 그의 공식 직함은 우당기념관장이다. ‘우당’이 그의 출생의 비밀을 푸는 키워드다.
 
이종찬의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의 아호가 우당이다. 우당은 1910년 경술국치 직후 15세 된 아들 이규학을 포함해 40여 명의 가족과 함께 만주(길림성 류하현)로 망명, 독립군 산실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우당의 아들이자 이종찬의 선친인 이규학도 신흥무관학교 2기생이다.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한국 독립운동사는 매우 빈약했을지도 모른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대승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됐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이 집안에서 내려오는 잘 안 알려진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전민규 기자]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이 집안에서 내려오는 잘 안 알려진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전민규 기자]

이종찬은 1936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나 상해의 소학교에 다니다 해방을 맞았다. 우리 독립투사들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그의 성장시절과 겹친다. 1945년 해방 이후 백범 김구와 우사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상해로 모였다. 당시 상해에서 찍은 사진이 전해지는데, 백범 바로 앞에 당당하게 서있는 10세 소년이 이종찬이다. 임정요인들은 미군이 빌려준 비행기를 타고 환국했고, 이종찬은 난민선을 타고 돌아왔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잘 잊히지 않는 법이다. 그 사진은 이종찬 인생의 역사적 순간이다. 그때 상해에서 임정요인들과 사진 찍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1월 4일과 14일 두 차례 만나 대화를 나눈 이 위원장은 “백범 선생을 직접 만나본 사람이 지금 얼마나 살아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들어온 이야기를 이제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이종찬의 친가만 독립운동 명가가 아니다. 그의 외가도 대단한 독립운동 집안이다. “우리 외가의 3부자가 고종이 말년에 가장 신임한 측근이었다. 외할아버지 조정구(1862~1926)는 기로소비서장(耆老所祕書長)이었고, 그의 장남 조남승(1882~1933)은 비서승(祕書丞), 차남 조남익(1885~1924)은 시종(侍從)이었다.” 요즘 식으로 하면 외할아버지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외삼촌은 핵심 비서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최측근이었다.
 
1918년 찍은 이종찬의 부모(이규학, 조계진) 결혼 사진. [사진 우당기념관]

1918년 찍은 이종찬의 부모(이규학, 조계진) 결혼 사진. [사진 우당기념관]

이종찬의 친가와 외가가 만나는 과정이 출생의 비밀의 골자에 해당한다. 이종찬의 외가는 본래 노론 집안이었고, 친가는 소론이었다. 당파가 다르면 집안끼리 통혼조차 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두 집안에서 결혼이 성사됐다. 이종찬의 친할아버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외할아버지 조정구의 딸이자 조남승의 여동생인 조계진이 결혼한 것이다.
 
‘세기의 결혼’이라 할 만한데 그 내밀한 스토리는 100년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만주로 망명했던 이회영이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을 모으러 1913년 국내로 잠입했다. 상동교회 시절 알았던 윤복영(윤형섭 전 문교부장관 부친) 집에 숨어지내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망명할 때는 모두가 같이 망명할 태세였지만 3년 동안 일본의 무단통치를 겪으며 민심이 변했음을 직감한 것이다. 돈을 내겠다는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돈을 안내고 같이 망명하자는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우당은 독립운동의 열기를 재점화하는 방안은 고종 망명이라 생각하고 1915년부터 조정구, 조남승 부자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이회영

이회영

당시 고종은 경운궁(덕수궁) 속에 유폐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집안의 결혼 논의 명분으로 이회영-조남승 대화 라인이 형성된 것인데, 거기에서 핵심적으로 논의된 것이 고종의 북경 망명이었다. 고종 망명 계획이 이회영 아들과 조남승 여동생의 결혼으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결혼한 이규학과 조계진 사이에 난 아들이 이종찬이다.
 
“고종의 북경 망명계획과 독살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어려서부터 배웠다. 경운궁에 포위당해 있던 고종이 말년에 가장 신임한 측근이 우리 외가의 3부자였다. 1907년 헤이그밀사 파견 계획과 비밀 연락을 맡았던 이도 조남승 외삼촌으로 알고 있다. 이회영과 조남승·조남익이 고종의 북경 망명을 추진했는데, 고종도 더 이상 망명 이외엔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일본이 이걸 알아채고 고종을 독살한 것이다.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망명은 무산되었고, 고종의 독살 소식은 국민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국민들이 고종을 무능하고 바보로만 여겼다면 거국적 3·1운동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민주공화제도 그전에 이야기가 있었지만 확실하게 국민들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은 1919년 고종의 승하 이후인 것 같다. 국민들은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순종이 즉위를 했지만 여전히 황제는 고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고종 사후 사람들이 이제 왕정은 끝났다고 여기게 된 결과 공화제가 대두했다.”
 
고종 독살 소식이 전해진 1919년 1월 21일 이후 사람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망명계획을 세운 이회영은 대책을 세워야 했다. 우당은 2월 8일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혼이던 아들·며느리와 함께 3·1절 직전인 2월 24일께 다시 북경으로 망명했다. 고종이 정상적으로 승하했다면 당연히 장례를 주관해야할 조정구 3부자도 이때 함께 망명했다. 우당은 북경으로 떠나며 주위 사람들한테 “인산일(고종 장례식날)이 되면 큰 난리가 날 테니까 몸조심들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시정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지만 3월 1일의 봉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조남승

조남승

외할아버지 조정구는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제시한 작위와 은사금을 거절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명이었고, 두 차례 자결을 시도했다. 이종찬은 지금까지 미뤄 온 조정구의 독립운동가 신청서를 올해 제출할 예정이다. 정계 은퇴 이후 지난 20년간 그는 친가와 외가의 독립운동 비사(祕史)를 입증할 자료를 찾아다녔다. 특히 이회영과 조정구 3부자간의 비밀대화와 관련된 기록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최근 새 자료를 하나 찾았다고 한다. 중국의 산동성 교주만(膠州灣)에 있는 고종의 해외 거처를 조남승 외삼촌이 독립운동자금으로 쓰기 위해 은밀히 매각했는데, 이 사실을 일본 영사관이 알아내 본국 정부에 보고한 기록이라고 한다. 고종의 망명 계획에 따라 북경에 고종이 거처할 행궁을 마련해놓았는데 이와 관련 문서로 추정된다.
 
헤이그밀사와 고종의 비자금 사용에 대한 문서의 행방도 찾고 있다. “고종황제가 조정구, 조남승, 조남익 3부자를 통해 이회영 및 상동교회 인사들과 채널이 가동되어 헤이그밀사 파견이 이뤄졌다. 이에 관한 외교 비사와 고종의 비자금 사용 내역 등 기밀문서 상자가 있었다. 고종의 지시로 조남승이 처음에는 강화도에, 그리고 다음에는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 감추어 놓았었는데, 뮈텔 신부에 의하여 일본이 알게 되어 이 문서들을 다 압수해 갔다. 우리 집에서는 이 문서상자의 행방을 찾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일본 외무성 자료실에서 문서목록을 발견했다. 이 문서는 일본 정부가 작성한 문서가 아니라 고종의 문서를 일본이 탈취해 간 것이기 때문에 국회도서관에서 그 소재를 파악 중이고 소재가 확인되면 일본 측과 정식 외교 교섭을 진행할 예정이다.”
 
“임정기념관에 이승만서 김원봉까지 우파·좌파 아우를 것”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은 2021년 8월 문을 열 예정이다. 이 위원장은 1919년 임정 수립의 정신이 ‘통합’이었듯이 임정기념관의 컨셉트도 ‘통합’이라고 했다. 몇몇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임정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이미 각자 기념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사를 연구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한테 임정에 참여했던 사람 수가 대략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니 2000명 조금 안 된다고 하더라. 우리 건립위원이 프랑스 레지스탕스박물관을 찾아갔었다. 1388명 되는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전부 다 게시해놨다고 하더라. ‘드골’의 이름을 더 크게 붙여놓지 않았고 다 똑같은 비중으로 게시해 놨다.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독립운동 참여자들을 이렇게 예우해야 일본에 ‘우리는 너희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념에 관련 없이 이승만에서 김원봉까지, 모든 사람을 다 담고 싶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서 의열단 김원봉까지 다 담는다는 것은 우파와 좌파를 모두 포괄하겠다는 뜻이다. “임정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은 후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씨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분명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때부터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는데 왜 1948년부터 대통령이었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는가.’ 다른 사람들한테 휩쓸리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에서 김원봉까지 다 임정기념관에 포함시킬 것이라고 말하니 공감하는 듯했다.”
 
우당의 동생이자 이종찬의 작은 할아버지가 임정 부주석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이다. 이종찬은 이시영의 삶에서 우리 역사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시영은 조선 말기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대한제국-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에서 모두 관직을 역임했다. 이 분은 대한제국,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을 부를 때 모두 ‘우리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다 같은 나라인 것이다. 이 분의 의식 속에서는 혼란이 없었다. 이시영의 삶은 우리 근대사의 연속성을 입증한다.”
 
※인터뷰 전문 ‘월간중앙’ 2월호 게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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