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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실세에 찍혀 낙향한 김육, 시련 속에 재기의 칼

중앙일보 2019.01.16 11:00
[더,오래] 김준태의 자강불식(1)

일찍이 맹자는 하늘이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실패와 시련을 준다고 했다. 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 절망을 딛고 고난에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운명과 싸우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간 이들의 발자취가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길 기대한다. <편집자>

 
김육 초상(유복본). [사진 실학박물관]

김육 초상(유복본). [사진 실학박물관]

 
“나 김육은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에게 의지하였는데, 8년 동안 상을 치르느라 병이 들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그러자 고모가 나를 어루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너는 우리 집안의 종손이니 네가 죽으면 우리 가문은 끊어진다’고 하면서 온갖 방법을 다해 몸을 보양해 주고 병을 치료해주셨다.”
대동법의 주창자이자 효종 대의 명재상 잠곡(潛谷) 김육(金堉, 1580~1658)이 죽은 고모를 회고한 글이다.
 
8년 동안 상 치르느라 병들어 죽을 뻔
김육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3살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강원도와 평안도를 오가며 피난 생활을 했고, 15살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흉년에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아버지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한 후 어머니와 함께 다시 청주로 피신했다고 한다. 19세에는 장손으로서 할머니의 상주가 되었으며 21세에는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8년 동안 상을 치렀다는 것은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의 연이은 상은 김육에게 큰 시련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김육의 집은 가난해 부모의 묘를 합장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흙을 져서 날라야 했다. 결국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소진된 김육은 쓰러지고 만다. 다행히 고모의 정성 어린 간호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김육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605년 소과에 급제해 성균관 유생이 된 김육은 집권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鄭仁弘)과 충돌한다. 정인홍이 사림의 존경을 받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공격하자 성균관 유생들은 청금록(靑衿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버렸다. 유생 명부에서 지워버린 것으로 정인홍을 유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송하한유도. 김육이 중국에 머물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 ⓒ공개도메인 [출처 위키피디아]

송하한유도. 김육이 중국에 머물 때의 모습을 담은 그림. ⓒ공개도메인 [출처 위키피디아]

 
이때 재임(齋任, 학생 회장격)으로 있던 김육이 주동자로 처벌받아 대과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얼마 후 자격이 회복되긴 했지만 정권 실세에게 찍혀버린 그는 관직 생활에 대한 기대를 접었던 것 같다. 온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 잠곡으로 낙향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그는 직접 농사를 지었고 숯을 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다면 잠곡에서의 시간은 행복했을까. 한양에 비해 많은 것이 부족하고 또 열악했을 테지만, 마음만은 편안하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답은 ‘아니다’다. 태어난 아들이 7개월 만에 죽었고 딸 역시 2년 만에 눈을 감는 등 참담한 시간이 이어졌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기억은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김육에게 절망이 짙게 더해진 것이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보통 사람은 주저앉는다. 운명에 체념하고 자기를 성장시키려는 노력도 멈춘다. 하지만 김육은 달랐다. 일찍이 그는 12살 때 『소학(小學)』을 읽다가 “보잘것없는 관직에 있는 선비라도 진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데 뜻을 둔다면 반드시 다른 이들을 구제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감동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그는 이런 생각을 덧붙인다. “관직에 있는 사람뿐이겠는가. 사람이 누구나 진실로 이런 마음을 갖는다면 비단 관직에 있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잠곡서 주경야독, 46세에 장원급제
그래서였을까. 김육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하면서도 필사적으로 학문을 닦았다. 백성들의 곁에서 그들의 애환을 함께 겪었고 어떻게 하면 백성의 삶이 나아질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이름 없는 촌부로 늙어 죽을지라도, 자신이 꿈꾸는 바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있는 `대동법 시행기념비`.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 감사로 있을 때 삼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면서 백성들에게 균역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 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했다. [중앙포토]

 
그러던 1623년, 그에게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인조반정이 일어나 조정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듬해 김육은 45세라는, 당시 사람의 평균수명을 넘긴 나이에 전시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때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상세히 서술하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제시함으로써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음성 현감으로서 올린 백성 안정책 상소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가평에서의 경험 덕분이었을 것이다.
 
만약 김육이 연이은 시련에 굴복했다면 어찌 됐을까. 자포자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는 오로지 백성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명재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고, 김육 또한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동료 재상 이경석의 평가처럼 김육은 “괴롭고 궁핍해도 그 삶을 의연히 겪어내길 마치 그렇게 일생을 마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태도로 나갔기에 빛나는 이름을 남긴 것이다.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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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김준태 동양철학자·역사칼럼니스트 필진

[김준태의 자강불식] 일찍이 맹자는 하늘이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에게 실패와 시련을 준다고 했다. 그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여기 절망을 딛고 고난에 굽히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운명과 싸우며 자신의 역사를 써내려간 이들의 발자취가 여러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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