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장에서] 사과만 하고 뒤로 빠진 대한체육회와 이기흥 회장

중앙일보 2019.01.16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15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대한체육회 이사회에서 회원 종목 단체의 폭력·성폭력 근절 실행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효성을 놓고 의문이 제기됐다. 이번 사태의 중요한 책임자인 체육계 수장이 종목 단체에만 엄중한 책임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폭력 근절책’ 실효성 의문
중요 책임자가 되레 책임 묻는 격
심석희 사건 1년 지나도록 방관

피해자 목소리 외면, 구조적 문제
체육시민단체, 이 회장 사퇴 촉구

이기흥 회장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준 피해 선수들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한국 체육에 성원을 보낸 국민과 정부, 기업인에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성폭력 가해자 영구제명 및 국내·외 취업 원천 차단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구조적 개선 방안 확충 ▶성폭력 조사 및 교육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 실시 ▶선수 육성 시스템의 근본적 개선방안 마련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이들 대책은 체육계 폭력·성폭력 엄단을 지시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1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체육계의 성적 지상주의, 엘리트 체육 위주의 육성 방식에 대해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며 “체육은 자아실현과 자기 성장의 길이어야 하고, 또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성적을 이유로 가해지는 어떤 억압과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를 피해 이사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이기흥 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이 자신의 사퇴를 요구하는 시민단체를 피해 이사회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이기흥 회장은 취재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22)가 조재범 전 국가대표 코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사실이 8일 알려진 뒤, 스포츠계에선 ‘미투’가 확산하고 있다. 9일에는 빙상계에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고, 14일에는 전 여자유도 선수 신유용(24)이 실명과 얼굴까지 공개하며 코치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알렸다. 심석희와 신유용 모두 미성년인 고교생 때부터 수년에 걸쳐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혀,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충격을 줬다.
 
조재범 전 코치는 지난해 1월 심석희를 주먹 등으로 폭행한 혐의로 기소됐고,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구속 됐다. 지난해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터진 조 전 코치의 폭행 사건은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대한체육회는 성폭행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신유용 역시 지난해 11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성폭행 사실을 알렸으나 주목받지 않았다. 이번 사건들이 체육계의 구조적 문제에서 불거졌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실제로 조재범 전 코치의 폭행이 알려진 뒤 1년이 지나도록 대한체육회는 진상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지난해 1월 대한체육회가 관리하는 스포츠 공정위원회는 조 전 코치에 대해 성폭행이 아닌 폭행 혐의로 영구제명 징계를 내렸다. 그런데 당시 의결 정족수 미달로 징계를 확정하지 못하다가 성폭행 문제가 불거진 지난 14일에야 확정했다. 대한체육회와 수장인 이기흥 회장에게 문제를 바로잡고 해결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대한체육회 이사회가 열린 이날 올림픽파크텔 앞에서는 문화연대, 스포츠문화연구소, 체육시민연대 등 체육계 여러 단체가 연대해 이기흥 회장 사퇴를 요구했다. 최동호 스포츠연구소장은 “이기흥 회장에게 묻고 싶다. 16세 소녀가 피눈물을 흘릴 때 그는 어디 있었는지.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기 힘든 이 한국 스포츠 현실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다”며 “이기흥 회장은 한국 스포츠를 이끌고 나갈 책임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6년 10월 대한체육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이기흥 회장은 2년 넘게 한국 체육을 이끌어 왔다. 재임 기간 수많은 폭력·성폭력 사건이 터졌어도 매번 “재발 방지”만 외쳤다. 대한체육회가 내놓은 이번 대책에 ▶성폭력 조사 및 교육을 외부 전문기관에 위탁 실시 ▶홈페이지·보도자료 등을 통해 처벌·징계내역 공시 의무화 ▶주요 사각지대 CCTV 보강과 남·여 라커룸 관리 및 비상벨 설치 등이 있다. 지난 9일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 발표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대한체육회와 이기흥 회장의 책임을 언급한 내용이 없다. 조사를 외부에 맡기고 가해자 엄벌을 약속하고는 대한체육회는 뒤로 빠졌다. 이 회장은 카메라를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이사회가 끝나고는 취재진 질문은 받지 않았다. 대한체육회는 매년 4000억원의 정부 예산을 종목별 가맹단체에 배분하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런 체육회가 사건이 터지면 사과만 반복할 뿐,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폭력·성폭력 문제 등 체육계를 관리·감독하는 주체는 대한체육회가 아닌 다른 기관이라는 게 자명해졌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