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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나는 왜 방조범이 되었나

중앙일보 2019.01.15 00:32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지난주 금요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입장 발표를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가 검찰청으로 출발한 뒤에도 한동안 같은 자리를 서성였다. 앞을 가로막은 건 4년 전 기억이었다.
 

사법농단 드라마에 판사들만 있었나
언론·국회·검찰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여러분, 그럼 저부터 마시겠습니다.” 당시 대법원장 공관에서 열린 사회부장 만찬에 참석했을 때였다. 행사가 시작되자 법원행정처 간부가 앞으로 나왔다. 양손엔 폭탄주가 한 잔씩 들려 있었다. 그가 두 잔을 순식간에 들이키자 와 하는 탄성이 터졌다. 박수받는 그 모습에 왠지 가슴 한구석이 짠했다. 상고법원 위해 저렇게 몸 바쳐 일하는데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 미안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고 고민한 끝에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결과는? 고작 상고법원 찬성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알고 있었다. 판사들이 의원회관을 돌며 로비하고 있다는 걸. 판사들이 누구에게든 빚을 지게 되면 재판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재판거래 의혹까지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상 조짐은 눈치채고 있었다. 척지는 게 두렵고 싫었던 건가. 나는 ‘진격의 대법원’이라고 행태를 지적했을 뿐 끝까지 파고들지 않았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이 과연 그때 뿐일까. 법조기자 시절 중요사건 판결을 놓고 논란이 일 땐 해당 판사가 가입한 단체부터 따졌고, 판사 성향에 고배율 현미경을 들이댔다. 판결이 편집 방향과 맞지 않으면 논리와 맥락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편향 판결로 몰아붙였다. 나는 차마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 보도들이 ‘물의 야기 판사’를 분류하고 재판에 개입하는 빌미가 됐으리란 걸.
 
나는 그렇게 사법 농단을 방조했다. 워치독(감시견)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 적당히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고 그들과 어울렸다. 그러면서 자위했다. 다른 언론사는 말도 안 되는 기사 써대고, 과도한 민원을 서슴지 않는데 그래도 난 ‘괜찮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청탁인데 과도하고 사소함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는 엄밀하지 않았다. 상대평가에 중독돼 너무 쉽게 스스로 면죄부를 줬다.
 
그때 그 판사들도 그랬던 건 아닐까. 보란 듯이 정치권력과 거래하는 검사들, 툭하면 보채고 을러대는 기자들을 보며 ‘우린 그래도 저들보다 낫지’ 하다가 한발 한발 빠져든 것 아닐까. 얼마나 소름 끼치는 광경인가. 저 잘 났다는 자들이 서로가 서로의 핑계가 되어 뒤엉켜 있는 꼴이라니.
 
그 지점에 서면 의문 하나가 풀린다. 2014년 12월 168명이나 되는 여야 의원이 상고법원 법안을 발의했다. 본회의 통과가 무난한 숫자였지만 법안은 법사위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선거재판에서 목숨 줄을 쥔데다 부탁할 일도 많은 판사님들이 굽신거리는 게 싫지 않았을 터. ‘발의쯤이야.’ 의원들은 헛기침하며 판사와의 특별한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사법농단이란 드라마엔 대법원과 청와대만 있었던 게 아니다. 언론도 있었고 국회도 있었고 검찰도 있었다. 정치권과 언론이 아직도 ‘법원 내 보수-진보 갈등’ 레퍼토리를 틀어대는 마당에 사법만 달라진다고 고쳐질 문제인가. 머리 좋은 판사들이 뒤돌아서서 작성한 문건들은 한국 사회의 동반 타락을 증언하고 있고, 그 폐허 위에 우린 서 있다.
 
김두식 경북대 교수의 『법률가들』은 해방 후 눈앞의 고문과 학살을 외면한 채 기소하고 유죄 판결했던 판검사들 행로를 추적한 뒤 “피의자에게 따뜻한 태도를 보이는 것 정도가 그나마 괜찮은 판검사들이 선택하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김두식은 아프게 묻는다. “그 시대에 훌륭한 판검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 나도 같은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과연 이 시대에도 훌륭한 판검사, 기자, 정치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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