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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재인의 정의는 신재민의 원칙을 품지 못했다

중앙일보 2019.01.14 00:04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문재인 대통령은 정의와 평등을 추구하고 타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게 최대의 장점이다. 그런데 청와대로부터 적자국채 발행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한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에 대해서는 달랐다.  
 
“신재민 사무관의 문제제기는 자기가 경험한, 자기가 보는 좁은 세계 속의 일을 가지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책결정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신재민 사무관이 알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정 권한은 장관에게 있다.” 문 대통령이 지난주 신년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어쩐지 “잘 모르는 일에 함부로 나서지 마!”라는 훈계로 들린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속 시원하게 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적이 없어 더 그렇다. 엘리트 공무원의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국민을 위해 직언한 젊은이를 기재부는 공무상 비밀을 누설했다면서 검찰에 고발했다. 실체적 진실이 가려지기도 전에 소통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문재인의 정의는 신재민의 원칙을 품지 못했다.
 
행정고시 출신 3년 차 사무관은 ‘기재부의 허리’로 불린다. 신재민은 330조원 규모의 국고금 관리를 총괄하는 든든한 ‘허리’였다. 기재부 동료들도 업무역량과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2017년 11월 15조원의 초과 세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적자 국채를 추가로 발행하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당당하게 반대했다. 빚이 있는데 수입이 늘었으면 빚부터 줄여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다. 이건 국가재정법 90조에 분명히 적혀있다.
 
국고채권 매입(바이백·Buy Back)을 통한 국채 1조원 조기 상환 계획이 하루 전날 취소되면서 국채시장이 뒤집어지는 초유의 곡절을 겪었지만 적자성 국채 발행은 없던 일이 됐다. 기재부 상사들이 그의 편이 돼주었고,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청와대도 뜻을 접었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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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 해소와 경기 활성화를 위해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쳤다. 그러다 보니 국가채무비율을 낮추는 데는 소극적이다. 2018~2022년 국가재정운용계획도 2018년 39.5%로 시작해 2022년에 41.6%로 오르게 짰다. 여기까지는 정부의 정책적 선택이다. 그런데 2017년 11월 당시 국가채무비율은 38.3%로 예산안 제출 때 제시한 목표치보다 낮았다. 김동연 전 부총리가 적자 국채 발행에 반대하는 차관보에게 “1급까지 올라갔으면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질책한 배경일 것이다.
 
미리 돈을 마련해 두면 추경 편성 때 국회에서 야당을 설득하기가 편할 것이다. 그러나 신 전 사무관은 추경예산과 국채발행이 필요하다면 그 회계년도에 국회를 설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충실한 ‘곳간지기’인 그는 국채를 발행했을 때 불필요한 이자가 발생해 국가에 손해를 끼칠 것까지 걱정했다.
 
만일 신 전 사무관이 스스로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의 일원이 돼버리거나 ‘정무적 판단’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 정부의 편법 재정 운영은 언젠가 청문회 대상이 됐을 것이다. 이런데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은 “불발탄을 양손에 든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말이다. 오죽하면 극단적 선택을 앞둔 신 전 사무관이 유서에서 “나는 일베도 아니고 자한당(자유한국당)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도 하고 싶지 않다”고 적었을까.
 
신 전 사무관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을지를 고민했고, 학점을 팽개쳐가면서 야학 교사로 활동했다. 양심적이고 패기있는 관료였다. 문 대통령은 그의 주장을 경청하고 숙고하기 바란다.  2017년 취임 후 첫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공직자는 국민과 함께 깨어 있는 존재가 돼야지 정권의 뜻에 맞추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돼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정부는 신 전 사무관에 대한 고발을 취하해야 한다. 설령 문제제기 방식이 투박하고, 불편한 내용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서 고칠 건 고치면 된다. 그가 오해한 부분은 제대로 알려주면 된다. 그게 열려있는 민주주의고 정의다. 무결점의 이의제기를 요구하면 어느 누구도 옳은 소리를 할 수 없다. 2016년 겨울에 공무원 신분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다는 그는 이 정부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신 전 사무관의 용감한 이의제기에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편법 재정운영은 꿈도 꾸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신재민의 원칙을 품어야 진영의 정의가 아닌, 모두의 정의가 살아난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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