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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현 논설위원이 간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 ‘이성의 법정’으로 돌아와야

중앙일보 2019.01.14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사법처리 임박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1일 대법원 청사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는 가운데 법원 노조원들이 정문 구조물에 올라가 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11일 대법원 청사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는 가운데 법원 노조원들이 정문 구조물에 올라가 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지난 주 기자회견과 검찰 출두 장면을 바라보는 법조계 시선은 “뭔가 개운치 않다”가 대세였다. ‘헌정 사상 첫 전직 사법부 수장에 대한 단죄(斷罪)’라는 의미 부여가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는게 상책”이라는 말 속엔 현 정부의 적폐청산 프레임에 “너무나 할 말이 많다”는 역설적 함의가 들어있었다. 양전 대법원장의 대응 방식도 못마땅해 했다. 뇌물 등 혐의가 적용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달리 전직 대법원장을 직권남용 혐의로 사법처리하는 것은 법리적 논란과 함께 정치·사회적으로도 큰 논쟁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서초동 법조계에선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고, 어떤 전망을 하고 있을까. 검찰에 대한 법조인들의 주문도 함께 들어봤다.

법원, ‘냉소적 방관자’라 자책
검찰, 피의사실 공표에 고심

“양, 영장심사 포기 모습” 주문도
김명수 거취 놓고 갈등일 듯

‘막무가내식 수사’ 회귀 접고
‘살아있는 권력 수사’도 필요

 
전직 사법부 총수는 지난 11일 대법원 청사 철문을 뒤로 한 채 입술을 떨며 입장을 밝혔다.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지난해 6월 1일 자신의 집 앞 놀이터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와는 분위기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법원 정문 구조물 위에 올라가 “양승태 구속”을 외치는 법원 노조원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경찰도,법원 소속 방호원들도 시위대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현 정부 적폐청산 작업의 상징적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의 광장’ 속엔 ‘이성의 법정’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끝까지 검찰의 포토라인을 거부한 것도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잡아야만 했던 전직 대법원장로서의 품격과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말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애매모호한 화법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말았다.
 
양 전 대법원장의 소환을 바라보는 법원의 시각은 어떨까. 법원내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가 재판거래 의혹으로 바뀌더니 사법행정권 남용에 이어 사법농단으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선 자괴감이 컸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에 이의를 제기하는 법관은 법원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적폐세력으로 몰고가는 여론 재판식 분위기 때문에 상당 수가 냉소적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으로 법원은 상당기간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가장 큰 건 선후배간의 신뢰가 깨졌고,정치적 성향이 다른 판사를 향한 모욕과 조롱으로 재판 과정과 결과에 대한 신뢰를 담보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정치와 정파의 조직으로 변질 된 셈이다. 검찰의 신문조서에 대한 불신은 극한 상황에 달해 향후 모든 재판에서 검찰의 고전은 불가피해 보인다.
 
수사팀을 제외한 검찰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검찰 간부는 이번 수사를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에 비유했다. “대의와 명분만 앞세워 우격다짐식으로 싸우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양 전 대법원장이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자신의 권한을 행사한 것은 어찌보면 나랏일을 한 것인데, 직권남용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이번 사건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법무부가 서둘러 만들었던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수사복무지침에도 어긋난 점이 많다는 것이다. 검찰의 과거사위원회가 노 전 대통령사건 때 수사팀이 피의사실을 흘린 것에 대해 재조사를 하고 있는 것과 모순되는 점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수사팀을 향해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대단히 건방졌다”고 밝혔던 것과 비교하면 뭐가 달라졌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금까지 수사 흐름으로 보면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할 가능성이 크다. 수사팀 관계자가 말한 것처럼 “전직 대통령 두명을 구속한 상황에서 전 대법원장이라고 주저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검찰은 한 두차례 추가 조사를 한 뒤 혐의 확정을 위해 내부논의를 거치는 방식으로 영장청구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 양 전 대법원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법원 내부, 특히 고법부장판사 이상급에선 구속영장 실질 심사를 포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검찰에게 빌미를 줘서는 안된다는 분석에서 나온 얘기다. 양 전 대법원장의 요구로 실질 심사가 이뤄질 경우 법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직 사법부 수장이 수사관에 둘러싸여 법정에 나오는 모습이 법원의 신뢰와 권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다 영장이 기각될 경우 검찰과 진보세력은 법원을 향해 “적폐세력의 저항”이라고 공격할 개연성이 크다. 검찰의 입장에선 ‘꽃놀이 패’나 마찬가지다. 이 사건 초기부터 법원과 보수세력 사이에선 양 전 대법원장이 모든 책임을 떠앉고 가주기를 바라는 요구가 꽤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도 대승적 차원에서 영장실질 심사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의 사법처리는 김명수 대법원장에겐 양날의 칼이 될 수 밖에 없다.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저항과 투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다시 법원 간부의 얘기. “김 대법원장이 자체 조사뒤 고발 등의 조치를 취하는 대신 검찰에게 모든 걸 일임한 뒤 강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수사를 지켜본 것은 리더십의 실종”이라고 말했다. 무리한 인적 청산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때문에 법원 내부에선 그의 거취 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불거져 나올 공산이 크다. 하지만 “나는 결코 지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고 입버릇 처럼 말해온 그의 태도를 감안할 때 법원 내부는 또 한 차례 보혁대결 양상의 진통을 겪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검찰의 입장에서도 사법농단 수사의 일단락이 한숨 돌리는 상황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수세력은 검찰의 적폐수사가 정파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끊임없이 비판해왔다. 때문에 검찰도 이제부터는 신(新)적폐세력에 대한 수사 채비를 갖춰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전직 검찰 간부는 “형사범죄는 원칙적으로 고의가 있었다는 점을 입증해야 처벌이 가능한데 지금까지 적폐 수사는 끼어맞추기식으로 이뤄진 점도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직권남용 혐의의 남용이라는 말이다. 현 정부 출범이후 이뤄진 검찰 수사가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권력층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 검찰권은 권력과 맞붙었을 때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법은 약자를 묶고 지배하기 위한 강자들의 발명품이고, 도덕은 강자를 제한하고 저지하려는 약자들의 발명품이란 철학적 논거는 이미 인류 문명의 탄생과 함께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불려다니는 지금, 문재인 정부와 검찰은 분명히 강자의 위치에 있다. 시민들이 현 정부와 검찰에게 도덕적 처신을 요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직 대법원장의 입장 표명을 흥분과 고함으로만 틀어막고 막무가내식으로 검찰로 내모는 것은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는 방식이다. 소위 사법농단 사건을 끝으로 현 정부의 적폐청산이 이성의 법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박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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