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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꾀어 온 90년대생 활개…교묘해진 ‘그놈 목소리’

중앙선데이 2019.01.12 00:02 618호 2면 지면보기
보이스피싱 적색 경보
최근 경찰대 산하 치안정책연구소는 2019년에 가장 많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범죄로 보이스피싱을 꼽았다. 금감원에 따르면 보이스피싱 피해액은 이미 지난해(10월 말 기준) 역대 최대 규모(3340억원)를 기록했다. 보이스피싱에 이용된 대포통장도 2016년 4만6000여 개에서 2017년 4만5000여 개로 줄었다가 지난해엔 다시 4만7000여 개로 늘어났다.
 
금융당국이 그동안 내놓은 대책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15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30분 지연인출’ 제도다. 통장에 100만원이 넘는 돈이 이체된 직후엔 현금인출기에서 이 돈을 바로 찾을 수 없다. 최대한 빨리 현금을 빼내 튀어야 하는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의 속성을 고려해 내놓은 대책이다. 근본 해결책은 아니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골든타임 확보 차원에서 효과가 작지 않은 것으로 금융당국은 보고 있다.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

이기동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

지연 인출 아이디어를 처음 금융당국에 제안한 사람은 이기동(39) 한국금융범죄예방연구센터 소장이다. 지금은 각종 금융사기 범죄 예방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의 과거 이력은 정반대였다. 이 소장은 2004년부터 8년여 동안 보이스피싱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는 대포통장의 국내 모집 총책이었다. 수사기관에 적발돼 2년6개월 동안 감옥 생활도 했다. 출소 뒤인 2014년 『보이스피싱과 대포통장의 정체』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자신이 경험한 보이스피싱 조직의 실체와 범죄 수법 등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2004년께 우연히 아는 사람이 ‘통장을 만들어 주면 개당 50만원씩 돈을 주겠다’는 얘기를 듣고 내 명의의 통장을 50개 만들어 보이스피싱 조직에 넘겨주고 2500만원이라는 큰돈을 벌었다.”
 
이 소장은 이후 본격적으로 대포통장 모집에 뛰어들었다. 그는 “한때 내가 대포통장 국내 최대 모집 총책이었다”며 “많을 때는 하루에 대포통장 400개가 내 수중에 모였다”고 했다. 대포통장은 중국이나 동남아 등 해외에 거점을 둔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과 연결된 한국의 현금 인출책에게 전달됐다. 이 소장은 “보이스피싱 조직에 ‘대포통장’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대포통장이 없으면 영업이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소장으로부터 대포통장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우선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 SNS 등을 통해 계좌 명의를 빌려줄 사람을 찾는 광고가 뿌려진다. 학생, 주부, 직장인, 법인 사업자 등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타깃이 된다. 대포통장 모집책들은 이들에게서 통장 한 개에 50만~80만원을 주고 계좌를 사들인다. 모집책들은 이 통장을 총책들에게 개당 100만~120만원을 받고 넘긴다. 전국 각지에서 대포통장이 올라오기 때문에 주로 KTX 특송화물이 이용된다고 한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통장이 확보되면 해외 콜센터에서 작전이 시작된다. 조직이 가장 신경 써서 관리하는 팀은 피해자를 직접 상대하는 콜센터 상담원들이다. 과거에는 한국말에 능한 중국동포를 고용해 상담원으로 썼다. 말투가 걸림돌이 되자 지금은 한국에서 데려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청년들을 이용한다. 콜센터는 한국에서 멀지 않으면서 물가가 저렴한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 차린다. 큰 조직은 건물 한 채를 통째로 빌려 숙식을 한다. 이 소장은 “개당 월세 15만~20만원짜리 방 20개를 빌리면 월 400만원의 비용으로 80명 정도의 상담 조직원을 동시에 가동할 수 있다”며 “보이스피싱 조직에 큰 비용은 아니다”고 말했다. 보통 한 방에 4인 1조로 움직인다. 이 중 한 명은 현지 총책과 연결된 감시자다.
 
상담원들은 개인정보 수집팀이 미리 모아놓은 자료를 바탕으로 뽑은 한국인들의 휴대전화번호 리스트를 이용한다. 특히 신종 보이스피싱 중 하나인 메신저피싱의 경우 특정인의 개인정보(주소록 등)를 해킹해 빼낸 뒤 지인들을 상대로 돈을 뜯어낸다. 지난해 12월 중순 인기 걸그룹 에프엑스(fx) 멤버 루나와 그의 가족이 바로 이 메신저피싱으로 피해를 봤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루나의 휴대전화로 악성 앱에 감염시킨 뒤 주소록을 해킹해 개인정보를 빼냈다. 이후 범인은 루나의 실명으로 이름을 바꾼 뒤 그의 부모님 등 가족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 “행사 중이라 정신이 없다”며 “600만원을 매니저 통장 계좌로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이후에도 1~2시간 간격으로 600만원을 요구하는 카톡 메시지가 루나의 어머니에게 두 번 더 전송됐다. 돈 액수가 매번 600만원이고, 수취인 통장 명의자 이름이 매번 달라진 점이 수상했지만 결국 돈을 뜯기고 말았다.
 
왜 범인은 매번 600만원을 각각 다른 계좌로 요구했을까. 이 소장은 “현금인출 한도가 1회 최대 100만원, 하루 600만원으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라며 “하루에 대포통장 한 개로 빼먹을 수 있는 최대치를 보이스피싱범들이 요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콜센터 상담원이나 한국에 있는 인출책 등 조직원은 해외에 있는 총책을 직접 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다. 수사기관에 적발되더라도 매번 중간관리책이나 하부 조직원들만 검거되고 총책은 빠져나가기 일쑤다. 최근 보이스피싱 조직은 팀을 더욱 세분화·전문화한다. 시민의 경계심이 높아지다 보니 더 치밀하게 속여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콜센터도 1, 2차를 나눠 구성하는 경우가 있다. 저금리 대출을 빙자한 보이스피싱 사기의 경우 이런 수법이 자주 동원된다. 피해자가 실제 은행 등 금융기관에서 걸려온 전화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끊고 진짜 해당 기관으로 전화를 걸어도 사전에 악성 앱에 감염된 피해자의 전화는 또 다른 콜센터로 자동 연결된다. 전화 수신지가 나도 모르게 바뀌는 것이다. 피해자는 속을 수밖에 없다. 보이스피싱 최대 피해자는 60대 이상 고령층일 것으로 여기지만 실상은 다르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피해액(3340억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55.5%)가 40~50대 연령층에서 발생했다. 20~30대와 60대 이상에서 발생한 피해액은 비슷한 규모였다. 이 소장은 “돈을 송금하고 인출하는 데 이용되는 대포통장을 억제하는 쪽으로 모든 관련 부처의 정책이 집중돼야 그나마 보이스피싱을 줄일 수 있다”며 “타인에게 계좌를 이용할 수 있게 빌려준 사람도 처벌 수위를 더 높여 경각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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