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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 랭보 그리고 1만보 걷기 신년계획

중앙일보 2019.01.11 15:00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25)
우선 모두, 새해를 맞이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연말에 들떴던 마음은 어떻게, 좀 가라앉히셨는지요?
 
저는 신정까지만 해도 조금은 들떠 있었는데 회사 시무식이 끝나자마자 시무룩 해졌습니다. 작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 될 것이란 게 뻔히 보여서요. 들뜬 직원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업무에 집중하게 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시무식’의 진짜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주 만나는 친구가 어느 날 배우 하정우 씨의 책 『걷는 사람』을 읽었다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인지 몹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앙포토]

자주 만나는 친구가 어느 날 배우 하정우 씨의 책 『걷는 사람』을 읽었다며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인지 몹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앙포토]

 
그런 점이 아쉬워, 오랜만에 새해 목표를 세워봤습니다. 바로 ‘탄산음료 마시지 않기’와 ‘하루에 1만보씩 걷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다이어트 하는 거냐고들 물으실 것 같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습니다. ‘탄산음료 끊기’는 그런 목적이 맞지만 ‘걷기’는 아닙니다.
 
물론, 꾸준히 걸으면서 칼로리 소모도 하게 되겠지요. 게다가 심폐기능발달에 근력 운동과 더불어 혈액순환 개선 및 골다공증 예방까지 할 수 있게 되겠지만, 그런 것보다 더 뛰어난 효능이 걷기에는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갑자기 왜 제 안에 ‘걷기 열풍’이 불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계기는 자주 만나는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그 녀석이 배우 하정우 씨의 책 『걷는 사람』을 읽었다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과연 하정우 씨는 기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걸어 다니는 사람이더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왜인지 두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몹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부터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은 물론, 어느 날은 지하철역 두 정거장 앞에서 내려 일부러 걷기도 했습니다. 역 안에서도 에스컬레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했습니다.
 
기자 간담회에 참석해 질문에 답변하는 배우 하정우. 나는 걷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걷다 보니 내가 사실 걷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자 간담회에 참석해 질문에 답변하는 배우 하정우. 나는 걷는 사람 이야기를 들은 후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걷다 보니 내가 사실 걷기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왜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딱히 하정우 씨를 따라 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그런데 걷다 보니 알겠더군요. 저는 사실 그리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목적 없이 걸어 다니던 학창시절, 단지 ‘걷는 사람’이었던 그 시절을 말이죠.
 
저는 중학교 시절부터 사색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친구들이 오락실에 가서 격투 게임 실력을 쌓을 때, 저는 서점에 가서 소설을 읽으며 산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친구들이 아이돌에 열광할 때, 저는 그런지 록을 들으며 삶은 정말 고통인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온통 또래와 다른 짓을 하고 있으려니 말을 섞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가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걸으면서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제게 오래된 놀이입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그런 놀이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일단 퇴근하면 몹시 피로하니 한 잔 술이 생각났고요, 한 잔 걸치면 걷기는 무리라 택시를 탔습니다. 허리둘레는 늘어가는데 다리는 점점 얇아졌습니다.
 
하지만 누가 제 다리 같은 걸 봅니까? 제가 보여줄 것은 영업실적과 충성심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개의치 않고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니까 퇴근하면 피로하여 한 잔 술이 생각났고요, 한 잔 걸치면 걷기는 무리라…. 그다음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걷기를 그만두고, 저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습관도 잃어버렸습니다. 질문이 없으니 답을 구할 것도 없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장소로가 정해진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걸까, 라는 질문이 몇 번인가 마음속에 떠올랐지만, 그것을 제대로 마주할 기회도 없이 회사는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걷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다시 걷기에 욕심을 내며, 저는 다시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걷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다시 걷기에 욕심을 내며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고 나서 꽤 오래 걸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사진 pixabay]

걷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뒤 다시 걷기에 욕심을 내며 자신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고 나서 꽤 오래 걸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다. [사진 pixabay]

 
내 일상에서 회사를 빼면 무엇이 남을까?
 
제가 우선 해결해야 할 질문은 이거였습니다. 혹자는 뭐 이런 질문이 있냐며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게서 회사를 빼면? 많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고…. 맞습니다. 회사를 빼도 인생에는 언제나 가족과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의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회사 일 빼고, 내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회사 일 말고 내가 머리를 쓰고 있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 그날은 꽤 오래 걸었습니다만, 결국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답은 ‘없음’이었습니다.
 
저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만 머리를 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외의 시간에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거의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원래는 소파와 한 몸인데, 9시부터 6시까지만 회사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었던 셈이랄까요. 그러자 다음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계속 이 상태로 지내도 괜찮은가?
 
12월,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많은 곳을 걸어 다녔습니다. 추위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추위란 피하고자 할 때는 끈질기게 우리를 괴롭히지만 당당히 맞서고자 할 땐 별 위력이 없는 것이더군요. 아무튼 추위로부터 자유로운 상황 속에 이리로도 걸어보고 저리로도 걸어보며 끝없이 자문해보니, 저는 이 상태로 지내는 것이 괜찮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회사에 다니기 위해서만 사는 것은 영 적성에 맞지 않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아직 그 답을 몰라 저는 여태 걷고 있습니다. 12월 스마트폰 만보기 앱에 찍힌 제 걸음 수는 30만6585 걸음이었습니다. 하정우 씨 정도 되는 걷기 마니아가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숫자겠지만, 게을렀던 최근의 저를 떠올려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는 기록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이 코너가 '시집 읽기'라는 것을 잠시 잊었습니다. 이쯤에서 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오늘은 시 한 편을 같이 읽는 것보다, 한 기이한 시인의 삶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시인 랭보. 랭보가 계속 걸었던 이유에는 차비가 없던 탓도 있지만 걷는 행위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중앙포토]

시인 랭보. 랭보가 계속 걸었던 이유에는 차비가 없던 탓도 있지만 걷는 행위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중앙포토]

 
랭보라는 이름의 시인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1854년 프랑스 샤를빌에서 태어난 아르튀르 랭보는 학교의 강압적인 수업과 모친의 지독한 경건주의가 뭔가 잘못됐음을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그런 그가 첫 가출을 시도한 것은 15세 때, 그런데 흔히 말하는 ‘중2병’과는 뭔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그가 가출해서 계속해서 걸었다는 것이지요. 물론 차비가 없었던 탓도 있지만, 그는 걷는 행위 그 자체를 즐겼던 것 같습니다. “난 그저 걸어 다니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라던 그의 말에서 잘 드러나는 사실이지요.
 
첫 가출 때 경찰에 체포되어 집으로 돌아온 랭보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책들을 팔아 여비를 마련해 다시 한번 가출합니다. 그리고 걸어 걸어 옛 선생님을 만나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하고, 여러 말썽을 일으키기도 하지요.
 
이후에도 무수하게 이어진 그의 가출과 방랑은 계속됩니다. 후대가 평가하기로는 그는 ‘맨발로 유럽을 돌았다’라고도 하는군요. 이쯤 되면 하정우 씨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굉장한 걷는 사람 아닙니까. 그의 고향인 샤를빌에는 현재, ‘걷는 랭보’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하는군요.
 
이쯤에서 시인 랭보의 아름다운 글을 한 편 소개해야겠습니다. 하지만 미리 덧붙이자면, 랭보의 시는 무척이나 오래된 데다가 프랑스어로 쓰인 탓에 지금 우리 독자들에게 큰 감흥을 남겨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번역가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그의 시를 읽기보다, 그의 '걷기'를 읽어보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어디든지 떠나가리라, 마치 방랑자처럼.
-랭보, ‘감각’ 부분

 
걷는 행위는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목적이 없는 순간이며 자유를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이 의자와 인간의 다른 점이다. [사진 pixabay]

걷는 행위는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목적이 없는 순간이며 자유를 상징한다. 인간에게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것이 의자와 인간의 다른 점이다. [사진 pixabay]

 
걷는 행위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하루 중 거의 유일하게 목적이 없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를 좋아하신다면 잘 알고 계시겠지만, 인간에게는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의자와 인간의 다른 점이지요.
 
회사에 다니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훌륭한 남편이 되거나 좋은 아빠가 되거나 모범적인 이웃이 되는 것도, 최소한의 의무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삶의 목적이 되어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무엇을 한다’는 얘기는 돈벌이 수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어떤 철학을 유지하며 살 것인가, 죽기 전에 스스로 가장 뿌듯해할 부분이 과연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걸으면서, 이런 문제들을 자꾸만 생각합니다. 오래 걸으려니까 육중한 체중이 부담스러워 탄산음료도 끊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저의 2019년은 과거보다는 좀 더 나은 해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연말쯤 되면, 다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여러분의 새해 목표는 무엇입니까?
 
전새벽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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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새벽 전새벽 작가 필진

[전새벽의 시집 읽기] 현역 때는 틈틈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다. 인터넷 사용법부터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은퇴 후에는 조금 다르다. 비트코인과 인공지능보다는 내 마음을 채워줄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시 읽기가 그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중장년층에 필요할 만한, 혹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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