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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돌아가신 분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방법

중앙일보 2019.01.07 00:29 종합 27면 지면보기
정제원 스포츠팀장

정제원 스포츠팀장

할아버지 제삿날이면 온 집안이 왁자지껄했다. 큰아버지 댁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는 날이었다. 큰아버지·큰엄마는 물론이요, 둘째 큰아버지·둘째 큰엄마와 고모·고모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사촌 형·누이들과 1년에 딱 한 번 보는, 촌수를 잘 알 수 없는 여러 명의 아저씨도 만날 수 있었다.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다 “얌전하게 놀라”는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제삿날은 축제에 가까웠다.
 

명절과 기일에 제사 지내는 집 점점 줄어
절차 간소화하더라도 좋은 전통 지켰으면

제삿날엔 이유도 모르고 저녁을 건너뛰었다. 부엌에서 피어오르는 전 부치는 냄새에 산적고기가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들려오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초록과 노랑 무늬가 들어간 분홍색 사탕 덕분이었다. 큰아버지는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어린 조카의 입에 분홍색 사탕을 넣어주시곤 했다.
 
“아이고, 울매나 배가 고플까유, 여슈, 사탕 하나 드슈.”
 
나는 분홍색 사탕을 통째로 먹기 아까워 손에 들고 죽죽 빨아먹었다. 그 사탕을 다 먹고 나면 손가락과 혓바닥이 온통 분홍색으로 변했지만, 그 단맛은 색깔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그래도 제사를 지내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다 지쳐 방구석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 엄마가 깨우면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얼굴과 손을 씻었다.
 
제사가 시작되면 일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큰아버지는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한 솜씨로 제사를 지휘했다. 큰아버지가 구슬픈 목소리로 “유~세차”를 외치면서 식은 시작됐다. “효자 건옥 상향~”이라는 말이 끝나야 무릎 꿇었던 다리를 펴고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건 곁눈질로 배웠다.
 
큰아버지는 노련한 제사장이자 마에스트로였다. 향을 피우면서 어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제사상 위의 젓가락을 산적 위로 옮기면서 당숙의 안부를 물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우리는 무릎을 꿇었고, 절을 올렸다. 그러다 촛불이 꺼지면 제사를 중단하고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합문(闔門)이라고 부르는 이 절차는 연극으로 치면 인터미션이었다. 5분 정도 지나 다시 촛불이 켜지면 연극의 후반부가 시작됐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기리는 의식은 해마다 그렇게 진행됐다.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요즘은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지 않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음식을 차리고 예의를 갖추는 행위는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사람들은 너무 바빠졌고, 한자리에 모이기는 더더욱 어려워졌다. 맞벌이 가정이 많아지면서 누가 음식을 준비할지를 놓고 갈등도 생긴다. 제사는 어느덧 대한민국 전체의 스트레스가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명절이나 기일에 돌아가신 분에게 예의를 표시하는 집은 점점 줄어든다. 한국에서 태어난 중국인(화교) 사업가에게 중국에서도 제사를 지내는지 물어봤다. 그는 “중국에선 더 이상 죽은 사람을 위해 음식을 차리지 않는다”며 “공자의 예절을 21세기도 보존하고 있는 한국에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예의를 차리는 건 아름다운 전통이다. 그러나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국을 끓이는 일은 품이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설이나 추석 연휴에 제사(차례)를 지내지 않고,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분을 위해 예절을 갖추는 전통은 21세기에도 지켰으면 한다. 제사를 구시대의 유물로 폄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절차를 간소화할 수도 있고, 음식의 수와 종류를 대폭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제사를 지휘하던 큰아버지가 마에스트로였다면 나는 그의 손짓에 따라 조연 역할을 수행하던 배우였다. 큰아버지는 제사를 통해 어린 조카에게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방법, 즉 예절을 가르치신 거였다. 분홍빛 사탕을 건네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큰아버지의 손길이 그립다.
 
정제원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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