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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법원이 기업이라면 법정관리 받을 상황 아닙니까

중앙일보 2019.01.07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사법농단 - 재판거래 의혹 속 형사 재판 법정 
서울중앙지법 5층 형사법정. 연초 휴정기 인 지난주엔 구속사건 등 일부 재판만 진행돼 한산했다. [권석천 기자]

서울중앙지법 5층 형사법정. 연초 휴정기 인 지난주엔 구속사건 등 일부 재판만 진행돼 한산했다. [권석천 기자]

법정 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습니다. 유명인 재판이나 특별히 챙겨야 할 중요사건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요즘 재판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습니다.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의혹으로 사법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판사들은 어떻게 재판하고 있을까. 당사자들은 또 어떻게 재판받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 달라진 건 없을까. 기자들이 잘 찾지 않는 일반 형사사건 법정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날은 온종일, 어떤 날은 한나절 방청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닷새가 이어졌습니다. 판사·변호사들 생각도 들어봤습니다. 제가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여러분과 나눠보고 싶습니다. 자, 법정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기 판사와 피고인들이 보이네요. 판사는 법대(法臺·법정 판사석) 위에 앉아 있고, 피고인은 그 앞에 서 있습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 선 피고인들
“이번만 감당할 수 있는 형량을 … ”

벗겨진 법원 민낯 부끄러운 판사들
“국민들 뵐 면목도 없고 … 죄송하다”

‘사법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판사들, 고통스런 질문 앞에 섰다

 
“저는 그날 1차에서 많이 마셔서…과일 몇 쪽 먹고 술은 일모금도 안 했습니다. 여성 둘이서 다 먹었는데…치사하게 그 먹고 안 먹고를 따지는 게 아니고요. 지네들이 법적인 걸 좋아하니까, 저도 그 말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죄송하게 됐습니다.”
 
서울서부지법 3층 즉결 법정. 술값 20만 원을 내지 않은 혐의(경범죄처벌법 위반)로 즉심에 넘겨진 50대 남성이 판사 앞에 섰다. 판사가 “그 일 이후에 술값은 냈느냐”고 묻자 남성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불쾌해서 접촉하지 않았다”고 했다. “피고인을 벌금 7만원에 처한다.” 남성은 선고 후 경찰관에게 벌금을 내면서도 할 말을 다했는지 후련한 표정이었다.
 
서울중앙지법 서관 형사법정. 판사가 호명하면 피고인이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말하는 것으로 재판이 이어졌다.
 
서울서부지법 법정의 안내판. 사건번호와 피고인 이름으로 재판 진행 상황을 알려준다. [권석천 기자]

서울서부지법 법정의 안내판. 사건번호와 피고인 이름으로 재판 진행 상황을 알려준다. [권석천 기자]

“좌회전 신호를 동시 신호로 착각했습니다. 30년 동안 택시 운전하면서 사고 한 번 없었는데 이런 일로 재판까지 올 줄 몰랐습니다. (한숨을 내쉰 뒤) 개인적인 실수로 여기까지 온 걸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잘한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싫어하거나 거부하는데도 괴롭히려고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니란 걸 믿어주십시오. (울먹이며) 꿈을 이루기 위해 12시간씩 주 7일을 일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 번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형량을….”
 
“억울합니다. 판사님. 저는 경찰관을 밀친 적이 없습니다. (두 손을 모으며) 당시 동영상을 한번 확인해주시면 제가 그러지 않았다는 걸….”
 
연말이 가까워져 오자 판결이 잇따랐다. 법정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사기 혐의로 기소돼…징역 6월, 실형을 선고합니다.”
 
“보이스피싱 관여자로…송금과 인출에만 관여했다고 하나…징역 1년 6월, 실형을 선고합니다.”
 
“휴대폰으로 신체 부위를 촬영…징역 6월에 처한다. 1년간 집행을 유예….”
 
한 구속 피고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실형이 선고되자 법정 밖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오늘 (구치소에서) 나올 줄 알고 옷도 가져왔는데….” 한 불구속 피고인은 실형 선고를 예상하지 못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판사님. 합의가 진행 중이고…지금 제가 들어가면 문제가 더 커지는데….”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피고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법정을 빠져나갔다.
 
연말연시 휴정기(休廷期)인 지난주엔 구속사건과 중요사건만 진행됐다. “우병우의 사적 이익과 피고인 본인의 공명심으로 국정원 업무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훼손하여….” 박근혜 정부 당시 불법 사찰에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추명호 전 국정원 국장에게 징역 2년 실형이 선고됐다. 방청석에서 기자들이 급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 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세상에 이런 재판이 어디 있어!”
 
피고인들 얼굴은 하나같이 절박했다. 저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결백과 선처를 호소했다. 판사들은 담담하게 재판한 뒤 준엄하게 선고했다. 겉으로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든 착잡함 같은 것이 있었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당사자와 변호인들 시선이 달라진 거 같아요. 사법 농단이다, 재판거래다, 부끄러운 민낯이 계속 벗겨지고 있으니 국민 뵐 면목도 없고…창피하고 죄송합니다.”(현직 판사 K씨)
 
“얼마 전부터 재판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하면 의뢰인들이 이렇게 말해요. ‘변호사님도 열심히 좀 해보세요.’ 다들 거래를 한다는 데 왜 당신만 가만히 있느냐는 거죠.”(판사 출신 변호사 S씨)
 
“뉴스 보다가 ‘비난받을 일이지만 형사처벌은 힘들 거 같다’고 했더니 아내가 대뜸 ‘그게 말이 되냐’고 하더군요. 국민 눈엔 판사라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사고를 친 건데, 판사들은 직권남용의 작은 프리즘에 갇혀 ‘우린 죄가 없다’고만 하고 있으니….”(현직 판사 H씨)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법관을 상대로 한 진정과 청원은 2016년 1476건에서 2017년 3644건, 지난해(1~10월) 3875건으로 증가세가 뚜렷하다. 사법에 대한 불신이 통계로도 확인된 셈이다. 불신이 무서운 이유는 재판의 본질에 있다. 한낱 종이에 불과한 판사들의 판결문이 인간의 자유와 재산을 빼앗을 수 있는 건 국민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믿음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그 많은 판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인가. 그 많은 법정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법농단이나 재판거래 의혹을 받아들이지 않는 판사들도 적지 않다. “아무리 압력을 받았더라도 판결만 제대로 했다면 문제없는 것 아니냐.” “문제의 문건들은 재판에 대한 청탁이나 압박을 시사한 것일 뿐 재판거래로 바로 연결할 수 없다.” “연루 판사들이 나무랄 데 없는 인재들인데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있다가 어쩔 수 없이 휘말려들었다.” 이에 대해 한 판사는 말한다.
 
“재판은 절차가 생명입니다. 양쪽 당사자 중 한쪽 얘기만 들어갔다면 그 자체로 잘못이고,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건에 적힌 대로 대법원에선 강제징용 사건 판결이 미뤄지고, 부산고법에선 변론이 재개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재판거래가 아니면 뭡니까.”
 
닷새 동안 내가 만난 당사자들은 판사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도 긴장했다. “어떻게 합니까. 판사를 믿어야죠. 바라는 거요? 얘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기만 했으면….” 불안한 점멸등에도 사법 제도가 굴러가는 건 판사들을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쩌다 헌법이 그어놓은 레드라인을 밟았느냐”고 묻는 자기반성보다 “법적으로 직권남용에 해당하느냐”를 따지는 내부논리가 더 크게 들리는 법원 현실이 참담할 뿐이다.
 
“판사들이 가진 권한과 자리, 모두 국민이 준 거잖아요. 뇌물수수 같은 공무원 재판에선 공직의 엄중함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자기들 허물 앞에선 면피에만 급급하니…정말 이중적인 모습이죠. 법원이 기업이라면 법정관리를 받아야 할 상황 아닙니까.” (변호사 K씨)
 
이번 주 금요일(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소환된다. 사법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양 전 대법원장과 함께 국민의 법정에 서게 된 판사들은 스스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사법은 회생할 수 없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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