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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자료에 의존해 임시정부 연구하는 현실

중앙선데이 2019.01.05 00:20 617호 1면 지면보기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① 뿌리 부실한 역사 만들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화려한 찬사가 만발하고 있다. 3·1운동을 혁명으로 바꿔 부르자는 제안도 나왔다. 일제 강점기에 실제 3·1혁명이란 용어도 사용했으니 다시 쓰지 못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3·1운동 현양 사업을 나무 가꾸기에 비유하면 ‘뿌리 없는 거목 만들기’처럼 보인다. 100년이라면 제법 큰 나무로 자랄 만한 기간이다. 뿌리가 빈약하면 어떻게 될까. 기초 자료 수집과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가운데 ‘정치적 말잔치’만 무성할 뿐이다.
 
임시정부(이하 임정) 100주년인데 임정 문서조차 거의 없다. 임정 문서는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망실됐다. 임정이 삼권분립의 민주공화정을 지향한 점은 높이 평가받는다. 그런데 임시의정원(국회) 자료만 전해진다. 1932년 말 일제가 펴낸 『조선민족운동연감』의 부록에 임정 문서목록이 적혀 있다. 일제가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해 임정 청사에 난입해 강탈해 간 원자료의 제목을 여기에 적어놓은 것이다. 이런 원천 자료를 아직도 못 찾고 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우리 독립운동사 연구는 일제 강점기 수사 자료나 판결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일제 수사 기록이라도 그나마 있으니 다행이 아니냐고 소극적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 일제의 시각이 반영된 자료에는 왜곡과 변조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대로 인용하다 보면 엉뚱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사례 중 하나가 3·1운동 당시 구호다. 200만 명이 넘는 우리 백성들이 목 놓아 외친 구호는 대한독립만세였다. 그러나 일제의 공판 기록엔 조선독립만세로 되어 있다. 실증을 내세우면서 이를 그대로 옮겨놓으면 3·1운동의 구호는 조선독립만세가 된다. 실제 우리 학자들이 써놓은 글들을 보면 이 대목을 얼버무려 놓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한’을 쓰는 것과 ‘조선’을 쓰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다른 일인가, ‘조선’도 우리 민족의 한 국호 아닌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을 맞으면서도 그 후손들은 자기 나라의 국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잘 모르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대한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그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 육군대장은 1910년 5월 30일 제3대 통감으로 임명되자마자 비밀리에 ‘병합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 7일 21개조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수립했다. 그 제1조가 ‘나라의 명칭’에 관한 것이다. “한국(대한제국 줄임말)을 개칭해 조선으로 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해 놓았다. 강제 병탄이 이뤄지기도 전에 ‘대한’이란 국호부터 말살하려고 나선 것이다.
 
‘한국 강점’이 완료되는 1910년 8월 29일 직후인 9월 2일에는 메이지 일왕까지 나서 “짐이 한국의 국호를 고쳐 조선이라 하는 건을 재가 하노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제1대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전국 언론·출판·교육계와 사회정치단체와 관련해 ‘대한 말살’ 작전을 전개했다. ‘대한’이란 명칭을 단 신문과 잡지, 단체들은 ‘대한’을 떼거나(가령 대한매일신보→매일신보), 다른 이름으로 바꾸게 했고(가령 대한신문→한양신문), 이를 거부하면 판매금지시켰다. 대한이란 말을 쓰면 제재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단체들은 기꺼이 대한을 고집했다.
 
이런 의문도 던져볼 수 있겠다.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문의 본문에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 같은 의문도 임정 문서를 포함한 원천 자료가 공개되면 밝혀질 수 있다. 참고로 기미독립선언에 앞서 조소앙이 쓴 무오독립선언의 경우 ‘대한’이라고 썼다. 그 제목도 무오독립선언서가 아니라 ‘대한독립선언서’라고 밝혀 놓은 것이 비교된다. ‘대한’은 1897년 대한제국 창건 때 처음 국호로 채택된 이래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로 계승되었고 해방 후 오늘까지 대한민국의 국호로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임정 문서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직후 임정 요인들이 귀국할 때 들고 와 김구의 경교장에 보관한 임정 문서인데 6·25전쟁 때 북한군이 가져갔다고 한다. 두차례 망실된 임정 문서 원본을 돌려받거나 아니면 사본이라도 구해 기초를 튼튼히 하는 일이야말로 100주년을 기념하는 최우선 작업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연구자가 줄고 있는 것도 문제다. 현재 50~60대 연구자는 그나마 10여 명 있으나 40대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20~30대는 명맥이 끊길 것을 염려할 수준이다.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서울대·고대·연대 등 주요 대학 사학과에 독립운동 전공 박사가 전임 교수로 임용된 사례가 지난 70여 년 동안 거의 없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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